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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사는 방법 _탁 재덕 (캐나다 한인여류문협)
 
 
언제부터인지 만나는 사람마다 기억력 감퇴에 대한 하소연이 만만치 않다. 나 역시 기억하기 위해 메모해 놓고는 그 메모지를 어디에 두었는지 찾지 못해서 애쓰거나, 메모한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경우를 겪기도 한다. 그럴 땐 어이없음에 허탈한 웃음을 흘리면서도 치매로 가는 지름길을 걷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은근히 착잡하다.
누구네는 무선 전화기가 냉장고에서 나왔다 더라. 누구 엄마는 몇 날 며칠을 찾아 봐도 없던, 사라진 밥그릇을 지하 보일러실에서 발견했다 더라...... 등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배꼽 잡고 웃으며 설마 하던 시절이 언제였나 싶다.
얼마 전 교회 일꾼들을 위한 연수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다. 강의를 듣기 위해 당연히 필기도구를 펼쳤는데 지도 신부님의 첫 말씀이 일일이 받아 적어서 무엇 할거냐고, 어디에다 써먹을 거냐고 하셨다. 금방 듣고서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즈음부터는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감동해야 할 때이며 억지로 받아들이려 애쓰기보다는 내어놓는, 베푸는 때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는데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가슴까지 내리누르던 메탄가스 같은 것들이 펑 소리를 내며 사라져 버린 듯 머리가 맑아지며 희열이 느껴졌다. 나에게는 그 말씀 자체가 감동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대중매체를 통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보니 그저 세상살이에 휩쓸려 가느라 삶의 방향감각이 무뎌졌나 보다. 나와는 상관없다 싶어 무시하고 접자니 남에게 뒤쳐지는 것 같아 불안하고 내 용랑은 386, 486인데 넘쳐나는 정보의 물결을 어찌 감당하리요.
문제는 너무나 친절한 정보 매체들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우리의 학창 시절은 책방에 가서 책을 골라 구입하고 시간 쪼개어 읽고 밑줄 그어가며 생각하고 판단하고 기억하던 노고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컴퓨터 앞에 앉아 버튼 몇 번 두드리는 것으로 언제든지 원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있으니 인간의 기억력이라는 것이 퇴보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노래방 기기의 활성화 탓에 노랫말을 외우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듯 하다고 했단다. 그렇다면 그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 필요성의 실종에 의한 것이다.
이렇듯 알게 모르게 침식당하여 퇴보하는 기억력 때문에 가방마다 필기도구는 필수 지참물이 되어 버렸고 언제부터 인지 신문을 부분부분 오려내어 챙기는 버릇까지 생겼다. 남편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세상 살아가는데 유용한 것들이라고 여겨져서 신문에 가위질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정리하지도 못한 채 늘어만 가는 그 부피 때문에 답답하고 조바심이 나던 차에 신부님의 말씀은 삶의 청량제였다. 길을 잃고 헤매다 이정표를 발견 한 것처럼 안도의 숨이 쉬어진다면 좀 과장일까?
신부님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아는 것이 힘'이라며 힘 자랑할 나이는 이미 지나지 않았나 싶다. 이제는 많이 아는 것을 자랑하지 말고 숙성된 와인처럼 삶의 향기를 뿜듯 내어 놓고 함께 나눔이 당연한 이치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우리를 깨우치는 것은 비범한 사람들만의 몫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사람이 있었다. 그저 평범한 우리 주변의 아줌마인 그녀는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이나 구입하는 큰 자루의 양파와 감자를 산다고 했다. 그 이유는 작은 자루보다 별로 비싸지 않으니 훨씬 경제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내심 놀라며 먹는 것보다 썩어서 버리는 게 더 많을 거라 했더니 짤막하게 '나누어 먹지요' 하는 답변이 총알처럼 날아와 내 가슴에 박혔다. 나는 그저 썩혀서 버리게 될 것만 죄스럽고 걱정스러웠는데 그녀는 거의 같은 값에 큰 자루를 사들이고 나누는 수고만 보태어 이웃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베풀고 나눈다는 것이 어디 물질에만 제한 된다던가. 누구네 엄마처럼 치매 예방의 한 방편이라는 구실로 아들 붙잡고 효도차원 고스톱 한판 더 치자고 조를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일손이 필요한 곳에 손 내밀어 주는 것 또한 나눔일 것이다. 진심 어린 따스한 말 몇 마디가 얼마나 사람을 기쁘고 기운 나게 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나라는 테두리 안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그렇게 거창할 것도 없는, 일상을 통한 나눔이라는 것이 보이는데 그것들은 기억력과 상관 없을 테니 얼마든지 가슴으로 퍼 올려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것이 바로 가슴으로 사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아끼지 말자. 가슴의 깊이는 아무도 모르나니 그 무제한의 용랑을 주저하거나 계산하지 말고 퍼 올려 보자. 이 가을, 우리들의 참 살이를 위하여 퍼 올리고 나르는 기쁨의 삶을 익혀 보리라.
많이 느끼고 많이 감동하고 나누며 베푸는 기쁨의 길에 들어선 이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어깨동무를 청해본다. 왠지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다.
친구들아, 이제부터는 기억력의 감퇴를 한탄하며 머리로 살려고 애쓰지 말고 자유롭게 가슴으로 살아 보자꾸나. (*)

기사 등록일: 2018-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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