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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에 생각하는 홀연히 사라진 독립투사 _ 오충근의 기자수첩
 
3.1만세운동에 앞장 선 ‘맹호출림’
국가보훈처 발표에 따르면 일제 식민지 시절 독립운동에 나선 사람을 약 200만명으로 계산한다. 그 중 60만명이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희생했고 서훈을 인정받은 독립운동가는 14,651명이니 턱없이 부족한 숫자다. 14,651명 중 여자가 285명이다. 나머지는 자료 미비, 타계 등으로 확인이 불가능한데 자료를 계속 발굴해 공적에 맞는 서훈이 이뤄져야 한다. 여자 독립유공자 중 최초로 사형선고를 받은 인물이 있으니 바로 안경신 지사다.
3.1독립만세운동이나 여자 독립유공자라면 유관순 열사가 생각나지만 안경신지사도 3.1운동에 참가해 만세 부르다 경찰에 잡혀 29일간 구류를 살았다. 안지사의 고향은 평안남도 대동으로 1888년 태어났다.
조선팔도의 기질을 말할 때 평안도를 맹호출림이라고 한다. 사나운 호랑이가 숲 속에서 뛰어나오는 모습으로 평안도 사람들의 용감하고 대담하고 굳센 기상을 을 표현하고 있다. 평안도 사람들은 ‘맹호출림’에 걸맞게 만세운동에도 최선봉에 나서 3월1일 서울보다 먼저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만세운동에는 교회가 앞장섰다. 장대현 교회를 비롯해 교회에서 먼저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 오히려 천주교회에서는 조용했다. 외국인 주교가 “절대 만세운동에 나서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교인들은 천주교회로 몰려가 “당신들이 조선사람 아니냐?”고 따졌다. 지금은 천주교가 사회문제에 적극 참여하고 개신교는 “골방에서 기도하는 게 최고의 사회참여”라며 사회문제를 외면하니 ‘상전벽해’는 아니지만 세월이 많이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여자 행동대원
29일 구류 기간은 안지사가 유치장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더욱 다지는 기간이었다. 유치장에서 나온 안지사는 3.1만세운동 이후 조직된 애국부인회에 가입해 강서지회 재무로 활동했다. 애국부인회는 당시 돈으로 2,400원을 모금해 상해임시정부로 보냈다.
동지들이 검거되고 일제의 교활한 수법으로 애국부인회가 해체되자 안지사는 생각을 바꾸었다. 비폭력 독립운동은 효과가 없다고 판단한 안지사는 무력독립투쟁으로 응징해 일본을 섬으로 다시 내몰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지사는 후일 자신을 취조한 고등계 형사에게 “투탄(投彈 폭탄 투척), 자살(刺殺), 사살(射殺)등 일회적 행동이 주효할 것으로 믿고 있다.”고 말했다.
여자독립운동가로서 무장투쟁을 주장한 운동가는 많지 않다. 애국부인회 진남포 지부장으로 안지사와 함께 활동했던 최매지는 “여성 투쟁가도 많으나 안경신처럼 끝까지 무력투쟁을 주장하며 강렬한 폭음과 함께 살고 죽겠다는 야무진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술회했다.


사랑에 속고
만주로 망명한 안지사는 임시정부를 찾아가 본격적으로 무장독립투쟁을 준비했다. 안지사는 평양 여자고등보통학교 즉 여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했으나 곧 이혼하고 혼자 되었는데 독립운동을 한다는 김행일과 함께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김행일은 “독립운동 하다 처자 잃은 외로운 몸”이라며 안지사에게 접근했다.
불꽃 같은 삶을 조국 광복에 바치기로 결심한 안지사도 여자인지라 외로움을 호소하고 모성을 자극하며 접근하는 김행일에게 마음을 허락했다. 두 사람은 엄혹한 망명생활 중에도 장래를 약속했으나 없다던 처자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음이 알려졌다.
감당하기 어려운 배신감도 배신감이지만 이미 김행일의 아이를 갖고 있었다. 상해에 정나미가 떨어진 안지사는 마음을 다잡고 광복군 영장 오동진을 찾아갔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말도 있으나 모든 것을 팔자소관으로 돌리고 다시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평남도청에 터진 폭탄
1920년 8월 미국에서 상원, 하원의원단 일행이 중국을 방문하고 일본으로 가는 길에 조선을 거쳐 가게 되었다. 오동진 영장은 조국독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집중 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평남도청에 폭탄 투척을 계획하고 국내에 결사대를 파견했다. 안의사는 2진으로 장덕진 박태열과 함께 국내로 들어왔다.
8월3일 계획대로 평남도청 신축건물에 폭탄을 던져 청사의 벽과 유리창이 박살 나고 일경 2명이 죽었다. 평양 경찰서에도 폭탄을 던졌으나 화승이 물에 젖어 터지지 않았다. 거사를 끝낸 일행은 일경의 검문을 피해 평양 시내를 벗어났다. 평안도 경찰이 총동원되어 수색이 시작되었다. 일행은 무사히 압록강을 넘어 광복군 총영으로 돌아 갔으나 임산부 안경신은 몸이 무거워 강을 넘지 못하고 함경도로 몸을 피했다.
원산, 함흥으로 피해 다니던 안의사는 이듬해 3월 아이를 낳고 며칠 후에 대동 경찰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심 재판에서 안의사에게는 사형이 언도 되었다. 1921년 6월12일 동아일보는 안지사 재판을 평안도 사투리를 섞어 이렇게 쓰고 있다.
“작년 팔월삼일에 평안남도 도텽 례삼부 새로 지은 집에 폭발탄을 던저 텽사의 밧갓벽과 유리창을 깨트리고 다시 평양경찰서에도 폭발탄을 던지어 파괴코자 하얏스나 화승이 비에 저진고로 인하야 목뎍을 달치 못하고 피신 중에 평양경찰서에 톄포된 평안남도 대동면 금제면 안경신(여 34) 동(同) 평양부 상수리246 최용주(30) 함남 위흥군 서면 서상리 박경옥(39)등 세명은 그간 평양 디방법원 검사국으로 압송되야 예심중에 잇다함은 임의 본지에 보도하얏거니와 그들의 뎨일회 공판은 지난 사일 오전 십시부터 평양 디방법원 형사부 법뎡 뎨이호실에서 사천(寺川)재판댱과 경(鏡) 영텬(永田) 두 배석판사가 열석한 후 개뎡되얏는대 조뎐(早田)검사는 피고 안경신에게는 사형을 구형하얏던바 지난 륙일에 안경신은 사형에 최룡주는 징역 일년 륙 개월 박경옥은 징역 일 개년의 판결언도가 잇섯다더라 (평양)


재판정에서 생긴 일
여자 독립운동가로서 최초로 사형 선고를 받은 안의사는 불복하고 항소해 복심 즉 2심 재판을 받게 되었다. 1심에서 김효록(나중에 고려대 교수를 지냄)이 증언을 했는데 김효록은 검사에게 사건 현장에서 여자 목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김효록의 조부는 이 부분이 마음에 걸려 조만식 선생을 찾아갔다.
“지난 번 있었던 도청 폭파사건은 남자들은 다 피신했고 여자만 잡혀 잡혀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아무래도 손자아이 증언이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조만식 선생은 그 말을 듣고 김효록을 불러 “다음 재판에서는 여자 목소리 못 들었다고 말하라.”고 당부했다.
2심 재판이 시작되어 김효록은 검사 요청에 따라 다시 증언석에 섰다. 이런 저런 심문과 답변 끝에 핵심이 되는 증언 차례가 되었다. “사건 현장에서 여자 목소리를 들었지?”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여자 목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결정적 증언을 뒤집자 화가 난 검사는 “야 임마, 너 위증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지난 번에는 들었다고 했잖아.”라고 김효록을 압박했다.
또한 몸을 피한 동지들도 “폭탄은 우리가 던졌지 여자는 폭탄 던지지 않았다.”는 내용의 편지를 법원에 보냈다. 2심에서 안의사는 10년 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자 안의사는 “내가 이미 3년이나 감옥을 살았는데 무슨 죄를 지었길래 7년을 더 가두어 두려느냐?”고 재판 장에게 따졌다. 김효록은 위증죄로 6개월을 선고 받았다.
나중에 김효록이 감옥에서 나왔을 때 조만식 선생을 그를 불러 위로했다. “네 증언으로 귀한 목숨 한 명을 살렸는데 나 때문에 죄 없는 네가 감옥살이 해 미안하다. 용서해 다오.”


비극적 종말
딸이 감옥살이 하는 걸 본 안의사의 모친을 통곡으로 세월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고 아이는 영양실조로 시력을 잃었다. 형기를 마치고 감옥을 나온 안의사는 신문과 인터뷰에서 “어머니를 잃은 것, 아이가 눈 잃을 것, 어느 것 하나 서럽지 않은 게 없지만 동지 장덕진이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었다니 눈물이 앞을 가려 세상이 원수 같다.”고 한탄했다.
실명한 아들을 데리고 안의사는 세상을 등졌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식조차 없었다.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도 모른다. 해방이 되었으나 독립운동가들이 설 땅은 없었다. 신생독립국에서 독립운동가 공적을 서훈하지 않은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니 우리는 정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가 서훈은 1962년 시작되었다. 그 해 3.1절 행사에서 안의사에게는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으나 아무도 훈장을 받으러 나오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2015년 안의사의 방계 후손이 나타났다. 안의사에게는 오빠 안창석, 언니 안필녀 등 4남매가 있었다. 출옥 후 안의사는 오빠 안세균 집에서 생활 했다는 기록이 있다.
안의사의 방계 후손은 언니 안필녀의 아들 황성옥이 낳은 딸 황경희씨로 황경희씨에게 안의사는 이모 할머니가 된다. 황경희씨는 부친 황성옥이 안의사를 면회한 이야기를 회상했다.
아이와 함께 감옥생활을 하는데 겨울에 난방이 안 되는 추운 감옥에서 입힐 옷도 없고 음식도 부실해 영양실조가 걸려 아이가 실명을 하게 되었다는 사연이다. 독립 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더니 독립운동의 고초가 아들에게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독립 운동하면 3대가 대우받게 3,400억을 추가 투입’ 한다니 만사지탄이나 다행스러운 일로 독립운동가 3대 대우 외에 아직도 한국사회 주류로 뿌리 내린 친일 매국 세력을 제거하는 일도 끊임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신상필벌(信賞必罰) 네 글자만 실천하면 된다.

기사 등록일: 2018-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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