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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데이에 살펴보는 캐나다 역사_오충근의 기자수첩
 
캐나다가 한 살 더 먹은 날이 다시 찾아왔다. 작년에 캐나다 데이 150주년 행사를 거국적으로 진행해서 그런지 올해 행사는 상대적으로 조용하게 지낸 느낌이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캐나다는 어떤 나라이고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오늘 날의 캐나다는 어떤 발판 위에 지탱하고 있는가? 캐나다의 정체성은 어떻게 이뤄졌을까를 생각해본다.
캐나다는 복합문화사회다, 요즘에는 다문화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캐나다의 문화는 이중언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캐나다는 평화를 수호하는 나라이고 갈등을 중재하는 나라다. 아이스하키의 나라이고 관용의 정신을 갖고 있고 연방주의, 민주주의 나라다. 오늘날의 캐나다라는 나라가 존재하게 되게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비미 리지(Vimy Ridge) 전투

1차대전이 일어나자 캐나다는 대영제국 옷자락을 부여잡고 마지못해 전쟁에 끌려들어갔다. 그러나 비미 리지 전투에서 캐나다는 용명을 떨칠 기회를 얻었다. 비미 리지는 아라스에서 택시 타면 15분 걸리는 거리에 있다. 아라스는 프랑스 북부에 있는 도시로 파리에서 기차로 50분 걸린다. 아라스는 로베스피에르 고향이다.
비미 리지는 1차대전당시 서부전선의 강력한 방어거점으로 독일 6군은 3중 참호와 철조망, 대규모 포병과 기관총 부대를 투입해 요새 수준의 방어망을 구축했다.
연합군은 비미 리지 전투에서 병력을 축차 투입하는 작전으로 막대한 병력을 잃었으나 1917년 4월 영 연방 캐나다군은 1주일간에 작전 끝에 비미 리지를 탈환해 열세를 면치 못하던 연합군이 최초로 군사적 승리를 이루어 국면을 전환시키는 역할을 했다.
4월7일 부활절 일요일 전투는 캐나다군 승리를 확정 지었으나 11,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연합군은 비미 리지 점령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C’est impossible. 그러나 어느 프랑스군 장교는 캐나다군이 비미 리지를 점령했다고 하자 Ah, les Canadiens. C’est possible(캐나다라면 가능하지)라는 말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작년에 비미 리지 갔을 때 프랑스 사람들은 “여기는 캐나다 땅”이라고 내게 말해주었다. 비미 리지가 문서상으로 캐나다 명의로 등기가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비미 리지는 영 연방 캐나다에서 영 연방이란 접두어를 떼어내고 독립된 정체성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캐나다에 발 붙이고 사는 사람이라면 비미 리지 전투의 의의를 여기서 찾아야 한다.
1차대전이 끝나고 1937년 비미 리지에 캐나다군 희생자를 추모하는 추모관, 추모탑이 세워졌다. 2차대전 때 히틀러는 비미 리지를 방문했다. 그러나 히틀러도 독일군에게 패전의 수모를 안겨준 캐나다군 추모관 추모탑을 건드리지 않았다. 비록 적군이지만 추모시설까지 파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보편적 의료보험

캐나다는 아무리 돈이 없고 가난해도 병원비 걱정하지 않는 나라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기본적 의료 서비스는 나라에서 무상으로 제공한다. 이 제도의 시작은 1960년 격렬한 논쟁 끝에 시작되었다.
토미 더글라스는 1944년-1961년까지 사스캐추원 주 수상을 지냈다. 이는 캐나다뿐 아니라 북미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정부다. 더글라스 주 수상은 “캐나다 모든 주는 주민들에게 기본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야 된다” 는 믿음을 실현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의사들은 수입에 악영향을 받게 되고 정부의 통제를 받게 된다는 생각에 일제히 반기를 들었다. 의사들은 주 정부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목적으로 23일동안 파업을 지속했다. 마침내 의사들은 파업을 끝냈고 토미 더글라스는 새로운 정당 NDP를 조직했다. 후임 주 수상 우드로 로이드에 의해 보편적 의료보험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캐나다 모든 주는 사스캐추원처럼 보편적 의료보험을 실시하게 되었다. 보수당 출신 죤 디펜베이커 연방 총리는 다른 주에서 보편적 의료보험을 실시하면 연방정부에서 50%를 지원하겠다는 정책을 내세웠다. 이 정책은 1966년 연방정부 50%, 주 정부 50% 부담으로 확정되어 캐나다 전국에서 실시하게 되었다.
그 후 보편적 의료보험은 보수당에서 정권을 잡던 자유당에서 정권을 잡던 기본 골격이 유지되고 있는데 캐나다의 사회민주주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 제도다.


1867년 캐나다 연방결성

1867년 7월1일은 캐나다가 탄생한 날이다. 수천 년 동안 원주민의 땅이었으나 16세기부터 프랑스인 영국인이 캐나다를 탐험해 원주민과 모피교역이 시작되었다. 캐나다 초기 역사가 미국과 다른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가 원주민들과 관계다. 캐나다의 유럽인들은 미국처럼 군대를 동원해 폭력으로 원주민을 짓밟지 않았으며 모피교역을 통해 공존했다.
두 번째는 전쟁이라는 혁명적 방법을 통해 독립하지 않고 자치에서 독립으로 점진적인 방법을 통해 독립을 이뤘다. 본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지는 않았으나 영토 지배권을 놓고 영국계와 프랑스계가 싸웠다. 프랑스는 7년 전쟁에서 패해 북미 지배권을 영국에 양도했다.
주도권은 영국계가 가졌으나 프랑스계의 반발을 달래려고 퀘벡에서 문화적 정체성을 보장하는 정책을 세웠다. 프랑스계가 정치적으로 독립은 할 수 없으나 전통적인 가톨릭 신앙과 프랑스어 사용이 보장된다. 이는 BNA, British North America Acts에 명시되었다.
식민정부 시절 이민자가 늘어나고 경제규모가 커지며 자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1867년 온타리오, 퀘벡, 노바 스코시아, 뉴 브른스빅이 BNA에 따라 연방을 결성, 캐나다가 탄생했다. 사스캐추원과 앨버타는 1905년 연방에 가입했고 1949년 뉴 펀들랜드가 연방에 가입해 현재 캐나다의 골격이 완성되었다.
미국이 독립전쟁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왕당파들이 박해를 피해 캐나다로 이주했다. 남북전쟁 때는 노예들도 캐나다로 피신해왔고 캐나다는 노예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오늘날 캐나다가 난민을 대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여성 참정권

캐나다에 살면서 농담처럼 “캐나다는 여성 천국, 아이들 천국, 노인 천국”이란 말을 들었다. 그러나 캐나다가 처음 생겼을 때 성 평등은 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여성은 법률적으로 사람에 속하지 않았다. “여성의 권리”라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선구자적 여성들이 끊임없이 탐구하고 투쟁한 결과다.
여성들이 재산권을 갖게 된 것이 1925년, 선출직에 출마가 가능해진 게 1951년이다. 여성들의 사회진출로 참정권을 비롯해 여권신장의 계기가 된 것은 1차대전이라는 특수 상황이 작용했지만 여성들의 끊임없는 투쟁도 큰 몫을 차지했다. 특히 여성 5인방(The famous Five)의 투쟁은 캐나다 여권신장의 든든한 초석이 되었다.
BNA 24조에 “총독은 자격이 인정된 사람을 상원에 지명한다.”고 되어 있는데 1927년 5명의 맹렬 여성은 캐나다 대법원에 ‘자격이 인정된 사람’에 여자도 해당되는지 유권해석을 요청했다. 이듬해 4월 캐나다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여성은 그런 사람에 속하지 않는다” Women are not such persons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5명의 여성은 이에 굴하지 않고 항소법원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추밀원에 캐나다 대법원 판결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다. 1929년 가을 영국 추밀원은 사람(persons)에는 남자(men) 여자(women) 모두 포함된다는 ‘진보적’ 판결을 내렸다. 이 판례를 ‘persons case’라고 부른다. 이 판례로 ‘women are persons’이 되었다.
여성의 참정권, 양성평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 판례를 이끌어낸 5명의 여성은 모두 앨버타 출신이다. Nellie McClung 은 앨버타 주의회 의원을 지냈고Louise McKinney는 영연방 최초 여성의원이 되었고 Emily Murphy는 영연방 최초의 여성판사가 되었다. Irene Parlby는 앨버타 최초 여성장관이 되었고 Henrietta Muir Edwards는 국립여성위원회의 의장, 여성 노동자 변호사로 활동했다.

위에 열거한 몇 가지 외에도 캐나다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다. 외다리를 이끌고 불굴의 투지로 암 정복의 희망을 안겨준 테리 폭스는 캐나다를 빛낸 영원한 젊은 영웅이고 인권과 민주주의의 열정으로 자유와 권리장전을 선포한 피에르 튀리도 전 연방 총리는 2005년 동성애 합법화를 선언해 동성결혼의 물고를 열었다.
1920년대만 해도 불치의 병이었던 당뇨병 치료제 발명으로 수많은 생명을 구해 노벨 생리학상과 의학상을 받은 프레드릭 밴팅도 캐나다를 빛낸 인물이고 대량 살륙이 벌어졌던 2차대전에 연합군으로 참전해 지구공동체 일원으로서 책임 있는 역할을 한 것도 캐나다 정체성 확립에 기여했다.
앞으로 캐나다 역사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떤 인물이 나올지 모르나 150년 동안 쌓아온 캐나다의 명성과 정체성이 앞으로도 이어져 지구촌 평화와 복지에 이바지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기사 등록일: 2018-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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