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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동창회 87] “성차별의 죄악”을 거룩한 미사여구 안에 은폐하는 교회를 추방하자!
작성자 늘봄     게시물번호 13761 작성일 2020-08-16 08:40 조회수 2277

유럽과 북미의 모든 선진국들이 이미 차별금지법을 합법화했는데 아직도 이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한국의 정신적인 수준은 안타깝게도 봉건시대에 정체되어있다. 또한 이상스럽게도 차별금지법을 가장 반대하는 기관 중에 하나가 기독교 교회이다. 우리 사회에서 성차별동성애차별이 심각하도록 만연한 기관이 교회라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성차별주의는 교회 내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으며 또한 널리 퍼져 있고 매우 파괴적이며, 이를 더욱 부정적이고 이중적인 비극으로 만드는 것은, 기독교 교회가 이런 죄악을 달콤한 경건 미사여구 안에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오랜 세월 동안 여성에 대한 편견 혐오는 교회의 신성한 전통처럼 되었다. 그것은 하느님이 명령한 것이었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이었다. 성차별을 진실이라고 억지주장해온 교회는 항상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성서문자적으로 인용함으로써 정당화했다. 과거에 기독교 교회가 장악하고 통제하던 세계에서 이 조직적 성차별주의를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교회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형성된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은 종교 기관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의 구석구석에도 스며들어 있다. 이로 인해 여성의 활동 영역이 한정되었고, 이런 영역을 벗어나는 경우에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축출이 당연시되었다. 기독교 신자들은 인간의 성, 특히 여성에 대한 교회의 차별주의적믿음을 거부하는 것은 하느님과 성서와 교회에 대한 불신앙인 것으로 잘못 배웠으며 심하게 병적으로 세뇌되었다. 그러나 종교적 제도권의 끈질긴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루어 낸 여성 해방 운동은 여성을 위해 여성 스스로 쟁취한 위대한 과업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여성들이 평등권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앞장서서 여성의 편을 든 것은 비종교적 세속 사회였으며, 종교 기관은 외면하고 반대하는 방해꾼이 되었다.  

 

오늘날 완전한 인간의 권리를 얻기 위해 여성들이 힘겹게 이루어낸 일들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다. 미국에서는 1920년에 여성 투표권이 생겼고, 1932년에는 처음으로 여성이 내각에 임명되었다.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 최초로 여성 흑인 부통령이 탄생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여성들은 남녀 공학의 대학에 진학하기 시작했으며, 1981년에 여성 최초의 대법관이 임명되었다. 오늘날 미국의 주지사, 상원의원 하원의원직에는 여성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이밖에 영국, 노르웨이, 이스라엘, 파키스탄, 인도, 아르헨티나, 필리핀, 뉴질랜드, 캐나다, 한국 등의 국가에서 여성 정치인들이 국가의 정책 결정에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다양한 직업이 여성들에게 개방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대학교의 법대생의 절반은 여학생이며, 약대와 치대와 의대의 남녀 비율도 거의 같다. 일반 기업들의 여성 CEO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전에는 남성들로만 이루어졌을 상임이사회에 여성이 포함되지 않은 기업은 이제는 거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 대변혁의 시대에도 기독교 교회는 세속 사회에서의 여권 신장이라는 변화에 가장 심하게 반대하는 편에 속해 있다. 심지어는 오늘날 우리의 생활 속에서 여성 평등 운동이 지속적으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교회 지도자들은 여성에 대한 독선적 권위를 내세우고, 과거 시대에 속한 낡고 진부한 말들을 되풀이 하며 설득력이 없는 결정을 내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기독교인들을 생각하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기가 매우 부끄럽다. 인간의 성적본능에 대한 과거의 낡아빠진 정의를 종교적 헌신이라고 강변한다면 오늘날 우리의 가정과 사회가 치러야 하는 댓가는 매우 커질 수밖에 없다.

 

21세기의 현대 여성들이 가장 역겹게 생각하는 교회의 이미지는 아버지 하느님의 교회이다. 교회성직자 제도는 오직 남성들의 특권이고, 그 자리는 여성의 몸으로는 절대로 될 수도 없고 또한 되어서도 안된다. 따라서어머니 하느님의 교회는 불경스럽고 불가능한 말이며,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보수적교단들은 여자남편에게 모든 면에서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이것은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의 계획이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여자목사 또는 장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남자여자에게 복종해야 하는데 이는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원천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 내부의 성차별주의는 너무나도 깊숙히 자리잡고 있어서 상처받은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깊은 상처를 아물게 하려면, 하느님으로부터 목회자들과 장로들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모든 분야에 걸친 급진적인 개혁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는 이에 대해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전혀 노력도 하지 않는다. 교회가 오랜 세월 동안 가꾸어 오고 간직해온 하느님과 예수와 교회와 생명과 인간과 성과 성적본능과 세계관과 가치관에 대한 부족적이고 이분법적과거의 패러다임은 오늘날 일반 사회에서 이해하지 못하며 인정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사회새로운 세계관우주진화 세계관새로운 패러다임을 일상생활 속에 구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사회는 인종과 종교와 성과 성적본능의 경계 넘어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교회 내부의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패러다임에 식상하고 지칠대로 지쳐있으며, 꼭두각시처럼 수동적으로 억지로 끌려가고 있다. 교회의 이런 행위때문에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던 사람들조차 격분하여 교회를 떠났거나 다시 돌아갈 생각조차 않는다. 오늘 교회는 이분법적 차별주의우월주의를 포기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들을 잃을 것이다.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교회는 스스로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교인들에게는 고백과 회개를 강요하면서 교회는 결함과 오류를 거짓과 은폐로 감추는 비겁함을 중단하고, 솔직하고 담대하게 선명한 모습을 공개하지 않는 한 생존의 희망과 가능성은 풍전등화와 같다.

 

오늘날 남성 선호 여성 비하성차별은 교회와 사회 깊숙히 마치 호흡하는 공기 속에 스며들듯이 우리의 일상생활의 습관과 규칙과 예의범절 속에도 반영되었으며, 우리와 긴밀히 관련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기준이 되었다. 대다수의 남자들은 가부장적 시스템의 혜택을 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성차별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하지 못할뿐만 아니라, 남녀평등에 대해 꿈도 꾸지 않는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대학수준의 교육을 마친 여성들이 직장에서 고위직에 오르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다. 간혹 여성들이 정부나 사업체의 고위직에 있으면 남성들은 시기하고 비아냥거린다. 남성이 일을 잘하면 천재(genius)라고 칭찬하며, 여성이 일을 잘하면 암캐(bitchy)라고 조소한다. 비단 교회에서 남자만 성경봉독과 중보기도 그리고 예배의 사회를 맡을 수 있으며, 여자는 어떤 경우에라도 강단에 설 수 없다. 또한 교회 외부의 행사들에서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은 항상 남자들이다.

 

여자들에 대한 이런 금기사항들은 남자만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성서 구절을 문자적으로 읽고 직역적으로 믿기 때문이다. 여자의 역할은 이차적이고, 종속적이며, 남자를 돕는 것이며, 어떤 경우에라도 최종적인 결정권자가 되는 것을 금지시켰다. 지금까지도 성서문자근본주의자들과 남자들은 그것이 바로 하느님창조 질서였다는 망상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교회의 정의여성을 하나의 성스러운 생명체로 인식하지 못했다. 교회는 오히려 여성을 이류 인간, 불결한 인간으로 비하하고, 여성불완전한 존재라는 편견 혐오 의식에 사로잡혀 그들의 손발을 묶어 두고 잔인하게 고통과 절망을 안겨주고 있다.

 

1세기 교회사 초기를 살펴보면, 교회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벗어나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이원론적 사고가 지배적이었던 지중해 지역으로 퍼져가면서, 교회는 육체, 욕망, 성 모두를, 특히 여성의 육체, 욕망, 성을 매우 죄악시했다. 지독한 가부장제교회는 여성에 대한 편견 혐오를 거룩한 미사여구로 은폐하기 위한 술책으로 예수의 생모 마리아동정녀 어머니 마리아로 변신시키고, 계속해서 영원한 동정녀 마리아로 진화시켰다. 성모 마리아 신앙은 교회가 여성의 존엄성을 존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남성 하느님 즉 예수의 신성을 보호하기 위한 묘책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를 낳았던 성스러운 자궁을 예수 이후의 다른 아이들에 의해 오염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갈라디아서 (1:19)와 마가복음(6:3)에 기록된 예수형제 자매들에 대해 갑자기 딴소리를 시작했다. 즉 그들이 이복이라든지, 사촌이라든지, 아니면 요셉의 전처 소생으로서 예수와 아무런 혈족관계가 아니라는 것 등의 주장이 등장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동정녀 마리아육체가 점점 더 성스러워짐에 따라 정확히 정반대로 일반 여성의 육체는 점점 더 죄악시되었다.

 

우수꽝스럽게도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을 때 그 신성한 아기를 낳던 중이나 산후에도 그녀의 처녀성은 유지되었다고 믿는다. 또한 새로운 처녀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서를 샅샅히 뒤져서 기원전 6세기에 기록한 에스겔서를 찾아냈다. “이 문은 잠가 두어야 한다. 이 문은 열 수가 없다. 아무도 이 문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이 문으로 들어오셨으므로, 이 문은 잠가 두어야 한다”(44:2). 이 구절을 이용하여 성모 마리아의 산후 처녀성을 예언자가 미리 알렸다고 합리화한다. 그 후 요한복음서에 부활 후의 예수가 창문과 문이 모두 잠겨 있는 방에 들어오는 이야기가 나오자, 이것을 처녀 출산에 비유하여 예수가 처녀막의 파괴 없이 태어날 수 있었음을 증명한다고 비상식적인 억지주장을 펼친다. 마리아의 성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그녀가 성적 정체성이 없이 무성화(無性化)될 때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일반적인 여성들은 모독을 당한 셈이며, 그들의 육체는 점점 더 천하고 죄로 가득 찬 것으로 간주되었다. 가톨릭 교회 전통에서 상징적인 마리아가 성스러워져서 천상에 올라가기 전에 먼저 무성화되고 비인간화된 것은 너무나 괴상한 논리이다.

 

18세기에 과학자들은 여성의 몸 속에 난자의 존재를 발견함으로써, 여성공동창조자임이 드러났다. 남성이 출산의 결정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남성 없이 여성 홀로 임신할 수 없다. 임신과 출산은 남성과 여성의 공동작업이다. 따라서 예수는 자신의 유전자아버지 요셉어머니 마리아로부터 각각 절반씩 공평하게 받은 것이다. 또한 성서문자근본주의자들의 주장대로라면, 마리아 역시 아담의 자손이므로, 원죄론에 따라서 마리아 역시 원죄의 흠을 지녔다. 그러므로 예수가 죄없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마리아 자신이 특별한 출산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무흠수태를 창안하게 되었다. 기독교에서 여성에게 성스러움을 부여하기 전에 여성을 무성화하고 비인간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존엄성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며, 여성에 대한 철저한 편견 혐오이다. 편견적대행위는 기독교 교회 구석구석에 비일비재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가톨릭 교회가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는 것은 가부장제의 여성차별의 부산물이며 여성 비하적인 행위이다.

 

그렇다면 성차별주의 동성애차별주의는 기독교에서 지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피할 수도 없는가? 보수적인 신자들은 이 질문에 대단히 부정적이다. 성차별 성적본능차별을 마치 성서적인 믿음으로 철저하게 세뇌된 성서문자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차별적인 만행을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차별주의를 포기하면 자신들의 믿음과 교회와 세상이 멸망한다는 두려움 공포에 빠져있다. 교회참 사람 예수의 정신을 따른다면 당연히 성차별동성애차별을 배척하는 차별금지법을 적극적으로 찬성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다시 새롭게 신중하게 읽고, 성서 예수에게 솔직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자신과 다른 성적본능인종종교차별하려면 교회 문을 폐쇄하고, 교회를 떠나는 것이 우리의 가정과 사회와 지구촌을 위해 현명한 일이다. 과거의 전통에서는 가능했는지 몰라도 21세기에 성서는 이분법적 차별주의살인도구가 될 수 없다. 예수는 성전과 교회처럼 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

 

<참고 문헌>

* 본 칼럼의 생각들은 이 책들에서 나왔으며, 오늘 이 세계의 교육, 종교, 과학, 철학, 정치, 사상을 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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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by  |  2020-08-17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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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를 차별로 등치 시켜 몇 천년동안 우월적 지위를 누린 게 쉽사리 고쳐지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고쳐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극우 개신교는 뿌리채 멸망을 해야 할 사회악이 되었더군요. 사회악이 최후의 몸부림을 치는 중입니다.

늘봄  |  2020-08-17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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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직역적으로 믿는 성서문자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오늘 사회악의 근원이 되고 있는 것은 한국과 미국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21세기에 성과 성적본능의 차별 그리고 과학에 대한 반대와 거부는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분열과 혼돈에 빠트리고 있습니다.

몇 일 전 서울에서 성서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마스크도 없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무시한체 밀집해서 군중대회를 열었습니다. 또한 교회들은 일요일에 전국 곳곳에서 예배모임과 각종 하계수련회를 가졌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바이러스 확산의 근원지가 되었으며, 한국 사회는 다시 팬데믹의 최악의 수준으로 치달려 올라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바이러스를 막어준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뻔뻔스럽게 늘어놓습니다. 이 말을 한 목사가 바이러스 양성판정을 받았으니, 이것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겠지요.

하느님은 바이러스를 막지 못하고, 바이러스 팬데믹을 계획하지도 않았습니다. 창조론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존재한 적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하느님은 욕심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을 통제하고 착취하기 위해 만든 장사꾼 정치꾼 하느님입니다. 3천 년의 인류 역사가 이 사실을 증명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과학자들이 경고하는 것을 무시한체, 마스크도 없이 사회적 거리두기도 무시한체 군중집회를 열어 다른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고통받는 것을 무시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의 신앙입니까? 과학을 거부하고 무시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참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생명을 창조했다면, 모든 여자와 남자는 평등하고 완전하고 성스러운 생명체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인간들이 죄를 짓지 못하도록 영원히 선하게 만들었지 않았겠습니까? 그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했다면 이 광활한 우주를 통치하는 하느님이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을 별 지구 위의 인간들을 가지고 옹졸하게 장난하지 않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 하느님이 자신을 믿는 사람은 천국에 보내고 그렇지 않으며 지옥에 보내는 그런 째째하고 속좁은 하느님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21세기에 읽는 성서의 핵심사상은 과학을 무시하고, 부족적인 성차별과 성적본능차별과 인종차별과 종교차별이 아닙니다.

참 사람 예수는 유대교 성전의 하느님 즉 오늘 교회가 믿으라고 강요하는 그런 하느님을 거부했습니다. 그 하느님은 차별적이고 우월적이고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이고 어린아이처럼 울며 떼쓰는 옹졸한 하느님이었기에 예수는 새로운 의미의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즉 경계 넘어, 우주적이고 통합적이고 비인격적인 하느님이었습니다. 예수의 하느님은 삶의 방식이고 표현이고 희망의 비전이었습니다. 그 하느님 앞에서 여자와 남자,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등의 차별이 없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분들은 신중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괜히 헛된 수고하지 마시고, 스스로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을 업신여기고 자신의 재산 목록에 올려 놓고 산다고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들을 비아냥하는 것은 누워서 침뱉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약 10%의 동성애 성향이 있습니다. 혹시 우리들의 자녀들 중에 또는 친지들 가운데 동성애 성향을 드러내지 못하고 마치 암흑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Utata  |  2020-08-17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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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 글에 저도 추천을 드렸습니다.
좀 사실은 사실대로란 취지에서 말이죠.

하지만, 많은 궁금증도 있습니다.

더 잘아시지만, 유태인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 남은 사람과
살지 못 한 사람중에 한 차이점이 생각이 납니다.

물론 가스실에 들어 가면, 누구나 다, 전부, 죽지만,

많은 상당수의 사람이 감옥 같은곳에서 죽어 나갔습니다.
후에 분석이 나오길, 희망을 가진자와 안가진자의 차이가 무척 컷다고 합니다.

늘봄님의 글은 잘못 보게 되면 사람들에게 어떤 희망을 뺏을수도 있습니다.

즉 착하게 사는게 손해는 아니란 모든 종교들의 믿음을 말이죠.

성경의 재 해석은 상당한 가치가 있을순 잇지만,


하지만, 잘못하면 인간에게
현실만 중요하게 여겨서, 상대적으로
올바르게 살고, 운이 없는분들은 절망감을 주실꺼 같습니다.

그럼 어떤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되 묻고 싶습니다.

어떤 가치관을 심어서 인류가 진실을 바탕으로 인격적인
문화를 발전시킬수 있는지 말이죠.


늘봄  |  2020-08-17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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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중요한 질문을 제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지난 7년 동안 씨엔드림 언론매체를 통해서 님의 질문에 대해 다각적으로 답해드렸습니다. 지금 다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방대합니다.

그러나 간단히 말하자면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사는 길을 추구하고 탐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를 갖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며, 죽음과 생명의 의미가 무엇이며, 인간과 자연과 우주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기존의 전통적인 종교체제들은 거짓말들로 사람들을 우롱하고 탄압하고 착취했습니다.

이기적인 욕심과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어 자유하게 행복하게 만족스럽고 의미있게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을 믿어야만 하는 종교나 교리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인류가 겪었던 쓰라린 경험입니다.

21세기에 우리는 과거에 믿었던 종교들(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없는 사회가 필요합니다. 그 대안으로 자율적이고.창조적인 영성(spirituality)이 필요합니다. 즉 과학을 무시하지 않는 영성, 경계 없는 영성이 필요합니다.

내세작인 종교 없는 사회,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초자연적인 하느님 없는 종교, 과학에 기초한 종교는 사람들이 두려움과 공포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짧게 집약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Utata  |  2020-08-17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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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은 죄송하지만, 어떤 깊히를 가지고 계신가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때론 생각의 다른 깊히를 가진 분들과 이약기는 너무 제한적입니다.

좀 더 깊히 들어가보겠습니다.


1) 꿈, 현실의 기억이 다른가요?

- 아름다운 꿈을 꾼 기억과, 사실을 경험한 기억이 과연 차이가 있을까요?
아니면 차이가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2) 만일 그 기억의 차이가 사실상 모두가 우리 뇌에 있는 기억이고,
그 기억은 사실과 꿈을 실질적으로 구별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3) 윗글에 말씀을 드렷듯이, 희망을 가진 사람과, 꿈이 없는 사람의
현실의 차이는 너무나 극단적일수 있단 이야기 입니다.

4) 그럼 다시 여쭙겠습니다.

비록 일부 잘못된 종교라고, 객관적으로 훌륭한 문명을 가지고 온 종교를...
사실이 아닌 일부 오류를 밝혀서 그 꿈을 깨는게 올은지...

아니면, 비록 사실과 좀 떨어져도, 그 꿈을 가지고 사는게
더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지 한번 생각해볼필요가 있지않을까요?

5) 인류에게 종교를 깨는것은 어쩜 인류의 꿈을 깨는게 될텐데...

과연 진실 (아주 일부만 밝혀진) 이란 미명아래,
인류의 모든 꿈을 깨서 삭막한 삶을 사는게 올은지요?
물론 약각의 바뀌어진 진실을 가지고 말이죠.

6) 꿈이라도 때론 힘든 삶을 치유맏고, 위로 받는건 어떤지요?

7) 다 깨고, 작은 진실이란 미명아래,
인류에게 희망이란 꽃을 꺽을 필요가 있는지 말이죠.

8) 지금 살고 계신게 사실이고, 허상이 아니라고 구분을 하실수 있는지요?
우리가 한개의 꿈의 시나리오가 아니란 말을요.

9) 아마 우리에겐 희망을 줄수 잇는 '완전한' 진실을 가지기 전에,
약간의 거짓도 인류에게 더 훌륭하지 않을까요?

- 비록 환경이 어려운 아이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게 잘못일까요?
또한 내가 현실이 척박해도,'
올바르게 살아서 복받을꺼란 꿈들 말이죠.

현실적으론 확률이 제로에 가깝더라도요.

10)아마 그걸 빼앗아 버리면, 인류는 정말 고통스러울꺼 같습니다.
확고히 알기 전까지는 상상의 꿈의 가치를 인정하는게 좋을꺼
같습니다.

늘봄님 글만 따르면, 너무 삶이 허망하지 않을까요?
물론 다는 아니지만, 삶에 집착하시는 분들께요.

즉 죽음을 어렵게 받아들이시는 분들 말이죠.

Zzzvst  |  2020-08-17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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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죠.
마치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있는 것처럼요.
짧게는 오늘 저녁, 길게는 몇십년 뒤, 우리가 다 흙으로 돌아갑니다.
늘봄님 주장대로 완전한 무로 돌아가는지 , 성경의 씌여진 영원한 형벌의 지옥이 기다릴지 죽어보면 알겠지요. 늘봄님이 이토록 우직하게 무신론을 설파하는 이면의 무의식은 바로 두려움일지도 모르지요. 신의 존재를 본능은 알고 있거든요.

늘봄  |  2020-08-18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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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DNA는 138억 년 전 빅뱅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저의 인간의 본능(본성)은 40억 년 전 최초의 생명체가 지구상에 등장했을 때입니다.

하느님(신)은 저의 본성(본능)이 탄생한지 약 39억 9999만이 지난 후에 뒤늦게 등장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45억 년 전에 지구가 탄생했고, 약 260만 년 전에 최초의 원시 인간이 등장하고, 우주진화는 계속되어서 약 4만 년 전에 현대 호모싸피엔스 인간이 등장했고, 약 1만8천 년 전에 프랑스 남부의 어느 동굴에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그리고 약 5천5백 년 전에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이 시작되었을 때에 설형문자가 발명되었고, 약 3700년 전에 최초의 알파벳이 탄생했고, 삼층 세계관의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이때 기록된 세상의 창조 이야기는 구약성서가 기록되기 보다 약 1000년 전에 이미 중동지역에 보편적으로 알려진 신화였습니다. 기독교 성서가 하느님을 처음으로 소개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다 성서의 창세기는 스메르 문명의 창조 신화를 완벽하게 복사한 내용들입니다.

신의 존재는 인간의 본성이 탄생한 후에 수백만 년이 지나고, 인간이 그림과 문자라는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장구한 우주역사에서 가장 최근에 만들어졌으며, 신은 인간의 종교적 요청이며 인간의 삶의 방식과 표현과 비전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느님은 인간의 창작품입니다. 인간의 본성(본능)이 하느님을 그림과 문자로 표현했습니다. 하느님은 실제로 인격적이고 물질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이 만든 다시 말해 요즘 교회가 강요하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고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죽은 후에 존재하지도 않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일도 없습니다.

다만 21세기에 하느님이란 말이 꼭 필요하다면, 하느님이란 말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해야 합니다. 새로운 의미의 하느님은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이 하느님의 의미는 차별주의와 우월주의와 부족주의와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반드시 믿어야 좋은 일이 생기고, 믿지 않으면 나쁜 일이 일어나는 그런 옹졸한 하느님이 아닙니다. 다만 스스로 새로운 의미의 하느님을 깨달아 알면 심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즉 조건없는 사랑, 자기 희생적인 사랑, 공정한 분배의 정의, 전쟁과 테러와 폭력이 없는 평화를 구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교회와 성당과 사찰과 사원에 나가지 않아도 심층적인 행복과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요즈음에 다양한 영성 프로그램들이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종교 단체에 속하는 것은 무엇을 믿기 보다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탐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잘 안되니까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사찰을 떠나고, 다시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유신론적 초자연적 하느님 없는 종교, 내세적인 종교 없는 사회, 하느님 없는 교회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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