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bed height="70" width="110" allowfullscreen="true" allowscriptaccess="always"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src="http://www.youtube.com/v/qECNAJvYUeo?version=3:&autoplay=1&loop=1"></embed>유튜브는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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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집권 노동당 청소년캠프에서 자동소총을 난사해 85 명 (추정)을 학살한 범인 Anders Behring Breivik 은 보수 기독교인이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매우 침착하고 차분하게 천천히 걸어가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부터 차례로 죽이기 시작했다.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들에게는 자동소총대신 권총으로 바꾸어 쥐고 그들의 머리를 향해 조준 발사했다. 확인사살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미친놈’ 같지도 않았고 당황하거나 서두르는 기색조차 없었다. 경찰복장 차림의 살인자는 마치 종교의식을 치르는 성직자 같이 확신해 차 있는 표정과 자세로 청소년들을 포함한 희생자들을 도륙했다.
그 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한 소녀는 이런 말을 했다.
“미국에서나 벌어지는 줄 알고 있었던 일이 내 나라 (노르웨이)에서 벌어졌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요”
이 열 아홉 살짜리 소녀의 <미국에서나>라는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단순하게 <미국이 총기살인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나라>라는 의미가 아니다. 소녀의 이 발언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자기의 종교적 신념을 타자에 대한 증오로 바꾸어 발산하기를 좋아하는 <원시문명>이 횡행하는 나라>라는 북유럽인들 나름의 관념을 반영하고 있다.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후반부 고백에는 이번 사건으로 그 노르웨이 소녀가 가져왔던 자기가 사는 나라에 대한 문화적 자부심이 산산조각이 났다는 자괴감이 담겨있다.
용의자가 체포되고 페이스북을 비롯한 그의 기록들이 공개되자 언론은 <Anders>를 가리켜 기독교 근본주의자 (Christian fundamentalist) 나 극우 인종주의자 (far-right wing racist)라고 불렀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는 기독교 근본주의나 백인 우월주의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있는 사상가가 아니다. 평소에는 그저 컴퓨터게임이나 즐기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에 쌓여온 비기독교적 문화-종교현상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감을 언제든지 폭력적 돌발행동으로 치환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평범한 보수 기독교인이었다. 도대체 평범한 한 인간의 내면에 밑도 끝도 없는 증오를 차곡차곡 쌓아준 외부의 사상과 문화적 환경은 무엇이었을까?
증오의 본질을 쉽게 요약하면 두 가지다. 하나는 두려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열등감이다. 그런데 두려움과 열등감은 감정이지 이념이 아니다. 감정적 증오란 일시적으로 폭발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동소총을 마구 난사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평온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차분하고 침착하게 학살하도록 만들지는 않는다. 인간의 증오감을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신념화해 준 그 무엇인가가 있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 무엇인가에는 정치적 이념도 있을 수 있겠고 개똥철학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강력한 그 무엇인가는 삐뚤어진 <종교적 신념>일 가능성이 가장 높겠다.
학살자 <Andres>는 극우 인종주의자였다. 그가 노르웨이에서 가장 증오하는 집단은 리버럴한 대다수 노르웨이 국민들이고, 그 대표적인 기구가 다문화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집권 노동당 정부다. 그래서 그는 그 노르웨이 집권당이 주최하는 청소년 정치집회를 목표물로 삼았다. 도대체 그 反다문화주의와 인종주의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서구 인종주의를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반유대주의의 역사를 빼놓을 수 없다. 언젠가 언급했지만 반유대주의 (Anti-Semitism) 는 두 가지 맥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유대인들의 강한 종교적 결집력에 대한 소외의식에서 비롯된 백인 주류(majority) 의 집단적 반발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집단이 가지는 뛰어난 지적 재능에 대한 인종적 열등감의 소산이다. 전자는 고대시대부터 있어왔고 후자는 주로 18 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과학과 경제 분야에서 유대인들의 활약과 부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러프하게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반유대주의와 함께 서구 인종주의를 이끌어 온 쌍두마차의 또 다른 한 축은 보수 기독교의 배타적 유일신관과 폐쇄적 구원론이다. 20 세기까지 서구를 지배해왔던 전통적 기독교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구원과 죄사함을 얻을 수 있다>는 매우 수상쩍은 사상을 가르쳐왔다. <인류사상사>에 존재하는 최대의 불가사의가 있다면 이렇게 이해가 안되고 논리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은 사상이 한 종교의 주류 사상으로 무려 2000 년을 지탱해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여기서 <믿음>이란 <예수라는 이름의 유대인 사내가 전 인류의 죄 때문에 대신 죽었으며 그를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음으로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는 의미다. 놀라운 것은 그 유대인 사내는 이 세상에 실재했는지 여부에 대해 사복음서 이외에는 그 기록조차 변변치 않다는 것인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 예수의 부활, 그리고 대속 (대신 속죄)을 믿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설파한 또 다른 유대인 사내 바울은 예수를 구경조차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내가 <전통 기독교 예수 구원론>의 핵심인 요한복음 14 장 6 절에 나오는 <나>라는 의미가 예수가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말로서의 <나>가 아니라 凡我, 즉 인간 일반의 자아로서의 <나>라는 개념으로 썼을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어떤 신학자들은 이 구절이 예수가 한 말이 아니라 후대에 가필된 문장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단다.
암튼 이런 교리는 그 자체로 폐쇄적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 소통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기 때문에 공존을 위한 타협이란 애당초부터 불가능한 사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Christian Identity 같은 극우 종교단체가 인종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성서해석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보수 기독교의 <전통적 신관과 구원론> 그 자체가 Christian Identity 같은 극우 기독교단체와 <Andres> 같은 기형적 테러리스트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종교교리적 토양을 제공해 온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독교는 변화해야 한다.
아니 사실 변하고 있는데 가만 보면 대한민국 기독교만 깜깜 무소식인 것도 같다.
하나의 참고사항으로, 기독교인들이1945 년 나그함마디에서 새로 발견된 문서들과 1947 년부터 10 년 간에 걸쳐 사해 (Dead Sea) 북서쪽 해변 11 개 동굴에서 발견된 약 900 여 편에 달하는 히브리 성서를 포함한 사해사본을 잘 연구하면 기원후 325 년 경 로마 황제권력과 종교권력의 수상쩍은 야심과 야합에 의해 조립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종교사상에서 벗어난 획기적인 새 기독교의 새 패러다임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sarnia 는 2 년 전쯤 나그함마디 문서 중의 하나인 The Gospel of Thomas 번역과 해설을 읽으면서 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이 문서는 나그함마디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 아니라 19 세기 나그함마디에서 북쪽으로 250 km 떨어진 곳에서 그리스어로 된 파피루스 두루말이형태로 그 일부가 발견됐다고 한다.)
예전에 sarnia 는 기독교에 대해 참 답답해 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지만 경전 어디를 봐도 사랑이 강조된 이야기는 별로 없고 <맹신>에 대한 강요만이 판쓸이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딱 한군데, 고린도 전서 13 장이 예외이기는 한데 sarnia는 혹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고린도 전서 13 장이 <낙하산>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나머지는 답답한 이야기들 천지다. 성경 구절들에 생명이 있다면 고린도 전서 13 장은 다른 장들로부터 왕따를 당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예전에 sarnia 가 기독교에 대해 답답해했다는 사례는 이외에도 많다.
가령 이런 것이다.
아래는 사도바울의 옥중 서신으로 알려진 (sarnia 는 그렇게 들었다) 빌립보서 3 장 8 절이다.
“Yet indeed I also count all things loss for the excellence of the knowledge of Christ Jesus my Lord, for whom I have suffered the loss of all things, and count them as rubbish, that I may gain Christ.”
sarnia 는 목사님의 외손자이므로 중학교 2 학년 때부터 이 구절을 읽었다. 성경읽기를 중시하시는 모친의 뜻을 받을어 성경을 읽었고, 영어책 읽기를 중시하시는 선친의 뜻을 받들어 영어 성경으로 읽었다.
빌립보서 3 장 8 절을 풀어 말하자면, <예수를 아는 것이 가장 높은 지식인데, 이 가장 높은 지식을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잃어도 무방하며 다른 것들, 즉 세상 지식이란 허튼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 구절의 주장이다. 어떤 성경에서는 <허튼소리>라는 의미의 rubbish- 쓰레기라는 의미도 있지만-를 <배설물>이라고 감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암튼 나는 영어고 한글이고 이 소리가 뭔 소리인지 수 십 년 동안이나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 철이 들어 생각해 보니 내가 문장 이해력이 부족해서 이 구절을 이해 못했던 것이 아니고 이 문장이 원래부터 말이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에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진리란 합리성은 둘째치고 우선 보편성이 있어야 그 온전함을 인정 받을 수 있다. 누구에겐가는 전혀 설득도 이해도 안 되는데 다른 누구에겐가는 맹신과 광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그 <진리>라는 것은 수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sarnia 는 오늘 이런 생각을 해 봤다.
노르웨이에서 이런 종류의 극우기독교 광신자의 무지막지한 증오범죄가 일어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어느 노르웨이 소녀가 <미국에서나>라고 말한 그 미국에서도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 의한 대규모 테러가 그렇게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내가 알고 있기로 가장 최근의 대규모 테러사건은 1995 년 Timothy McVeigh 가 일으킨 오클라호마 연방정부 청사 폭파사건이다. 물론 길가던 동성애자를 붙잡아 린치를 가한다던가 낙태 시술을 하는 산부인과 클리닉에 사제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은 심심하지 않게 발생한다.
근데 만일 오늘 대한민국의 인구 중 약 10 퍼센트인 500 만 명이 무슬림 이민자들이었다고 가정하면 전체 기독교 인구의 90 퍼센트 이상이 기독교 근본주의자라는 그 나라에서 과연 무슨 일들이 벌어질 수 있을까? 상상만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이다.
남의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2011. 07.23 21:00 (MST) sarnia (clipboard)
지나가듯 몇 말씀 올립니다. 제 버릇 그대로 책 이야깁니다. 여기서도 몇 번 언급했고 또 잘 아시겠지만, 사회학자 Mark Juergensmeyer가 쓴 [Terror in the Mind of God: The Global Rise of Religious Violence]는 종교와 폭력에 관해서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책 하나로 종교학계에 혜성으로 등장한 분이죠. 그는 재작년 세계 최대의 종교학 조직체인 American Academy of Religion의 회장직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낙태의사 살해시도 목사등 평범한 종교폭력가들을 심층 인터뷰를 하면서 무시무시한 통찰력으로 종교와 폭력의 문제를 잘 정리한 책입니다.
새로운 기독교적 성찰에 대한 책은 실은 필비님께 편지형식으로 여기 올릴까 했는데 시간은 없고 해서 소개합니다. 지난 6월 Calgary Herald Book Sale에 가서 건친 책입니다. 캘거리의 Knox United Church 소유 스티커가 붙여 있는 새책이었습니다. Lloyd Geering의 [Christianity without God] (2002)입니다. 제목이 엄청나죠? 저자는 제가 아래 필비님께 편지 형식으로 써서 기독교 유형을 구분한 것과 거의 똑같은 유형으로 기독교를 분류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그의 입장은 제 유형 지혜자 예수에 속하는 것으로서 좀 래디칼합니다. 156 쪽의 작은 책이지만 그의 해박한 지식에 압도되었고, 그 동안 제가 정리못한 여러 신학적, 철학적 개념을 아주 쌈박하게 잘 정리해서 독서의 즐거움을 무지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클립보드님이 이 책 보시면 엄청 좋아하실 것같아요. 강추!
그건 그렇고, 저는 신학교나 불교학교에서 [종교개론]과 [세계종교] 과목은 필수교양과목으로 채택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설교 시간에 기독교 설교자가 다른 종교에 대해서 행하는 무지한 언어적 폭력에 맘이 자주 쓰려집니다. 그렇다고 제가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요. 무지가 증오를 필연적으로 유발시키지는 않지만 중요한 요인이라고 하는 것은 hate crime 저자가 설명하더군요. 이 주장은 Jack Levin and Jack McDevitt, [Hate Crime Revisited: America\'s War against Those Who are Different] (2002)에서 찾았습니다. 이 책은 public library에서 discard한 것을 주워서 심심풀이로 읽다가 재밌어서 끝냈습니다. Jack Levin은 criminology와 sociology 전문가군요.
그리고 아직까지는 한국 보수적 기독교가 물리적 폭력으로 발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클립보드님께서 잘 지적하신 것같습니다. 그런데 같은 유일신 종교인 무슬림 인구가 증가한다면, 한국에서의 종교적 충돌과 갈등, 그리고 폭력으로의 발전은 예상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저는 한국 불교가 참 착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계사 등에서 쇠파이트들고 \"승님\"들께서 세상을 떠들석한 적은 있지만, 이것은 말사, 본사 등의 한국불교의 고질적인 구조적 모순 땜에 그렇지 전반적으로 한국 불교는 가장 착한 종교 중의 하나여서 아직 한국에서의 종교적 충돌은 세계의 이목을 받지는 않죠.
인용하신 요한복음 14장 6절에는 \"나\"라는 단어는 없읍니다. 14장 16절은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He told her \"Go, call your husband and come back\")로 기록 되여 있읍니다. 인용하신 구절이 몇장 몇절에 있읍니까? 감사합니다.
Pamoramas 님 안녕하세요. 요한복음 14 장 16 절이 아니라 14 장 6 절 입니다. 아마 Pamoramas 님이 눈을 감고도 외우실 수 있는 구절일 것입니다.
Jesus said to him.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예수가 말 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 누구도 아버지께 나아갈 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생각이 좌편향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Reaction 이 필요한 어떤 부분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조금 그런 면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시장경제와 자유경쟁을 지지하는만큼 <합리적인 자유주의자> 라고도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요한복음에 많이 자주 표현되는 \"나는 _이다\" (ego eimi (ἐγώ εἰμι) \"I am\", \"I exist\")는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은유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봅니다. 앞의 희랍어 에고는 대명사 I의 강조 표현입니다. 에이미 자체에 I am 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으니까요.
은유적 표현이 많다고 했을 때, 가령, \"예수가 나는 참포도 나무, 너희는 가지다\"라고 해서 예수가 물리적 나무인 포도나무는 아니죠. 여기서도 길, 진리, 생명도 은유로 본다면, 어떤 참 진리를 제시해 주는 분이 예수라는 것일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클립보드님이 말씀하신 나가 凡我,일 수도 있습니다. 인도철학의 보편적 절대적 자아인 브라흐만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데, 이 표현자체가 문학적 표현이므로 이런 범아 이상으로 해석될 여지는 얼마든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문학의 묘미겠죠. 성서는 종교적 텍스트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문학적 텍스트입니다.
Christian Identity를 비롯해 National Alliance, The World Church of the Creators 시간 나시면 리뷰 올려 주세요.
제가 지난 주부터 슬쩍 보기 시작한 책은 Richard Faltz의 책 [Religions of the Silk Road]라는 것인데 이것도 강추합니다. 우연히 thrift store에서 Foltz의 다른 책 [Spirituality in the Land of the Noble: How Iran Shaped the World\'s Religions]를 보고 작년에 읽고 반해서 [비단길의 종교들]은 개정판이 나오기 전에 아마존에 선주문했었습니다. 비단길의 종교들은 고대 문명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같습니다.
빌립보서 3 장 8은 바울 동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즉 예수에 대한 지식의 경쟁상황을 반영한다는 뜻입니다.
전 평소 일요일 아침에 하는대로 Indigo 에 커피 마시러 갑니다 ^^
정치나 문화 종교 모두 <광신>의 요소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지속적 확신>을 근거로 죄책감 없이 자행되는 폭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종교적 광신이 정치적 광신을 비롯한 다른 부분들에 비해 그 해악과 폐해의 정도가 깊고 광범위한 것 같습니다. 수리적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 통계를 조회해 보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지난 번에 아프리카 님께서 올려주신 신앙의 유형에서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첫 번째 유형에 매몰되어 있다시피 한데, 문제는 이런 유형의 폐쇄적이고도 배타적인 교리가 20 세기 이후 종교 문화간 이동과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는 시대에는 더 이상 <좋은 기능>을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노르웨이 사건은 서구 기독교가 가지고 있었던 과거 잔재의 부작용 중 하나일 것 입니다. 잔재라고 표현한 것은 <첫 번째 유형의 신앙>이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서는 더 이상 주류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 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다를 것 입니다. 대한민국이 조용한 이유는 대한민국의 기독교가 비폭력적이어서가 아니라 <착한 불교의 예>를 들어 말씀하신 대로 충돌을 일으킬만한 사회적 대상이 아직 적기 때문입니다. 만일 대한민국 기독교의 배타적인 교리에 필적할만한 또 다른 배타적인 종교문화가 확산되면 (근본주의 이슬람 같은) 대한민국은 세계 그 어느 나라 못지 않은 폭력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제 본문은 노르웨이 총기난사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전통적 교리 자체에 대한 비판만을 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바로 대한민국 보수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잠재적 폭력성을 경고하기 위해 작성한 것 입니다.
세속화론은 종교는 결국 die out/fade away한다는 전제에 기초해 있고, 탈세속화론은 특정종교가 힘을 잃으면 그 void를 다른 종교가 채운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저는 이론가는 못되지만 현재로선 저 자신을 탈세속화론자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경우, 완전히 세속화되었다고 하지만, 다른 신종교나 종파들, 그리고 이슬람등의 비기독교계 종교가 그 자리를 채워가고 있습니다. 스웨덴의 종교 상황에 대해서 제가 읽어 본 논문이 없어서 모르지만 유럽의 상황으로 일반화해 본다면, 이번 사건은 노르웨이라는 세속사회 (secular society)의 일탈적 형태가 아니라 세속사회에 종교적 void를 채우는 새로운 종교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짐작이라서 앞으로 이 쪽에 염두해 두고 그런 자료가 있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그리고 클립보드님의 마지막 단락의 문제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중입니다. 초자연적 실재를 지향하는 종교가 여전히 성장하고 그렇지 않은 종교는 쇠퇴한다는 측면에서 우리가 어느 종교현상을 규범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겠지만, 서술적으로는 클립보드님께서 말씀하신 이런 종교가 21세기 초까지는 맹위를 떨칠 것입니다. 우리가 죽기 전까지는 그럴 것이라는 것이죠.
절대자가 있다면 그 앞에서는 누구나 부족한 존재이겠지만 인간의 행위를 절대자와 비교해서 \'누구나 죄인이다\' 라는건 말이 안되게 아닌가요?
저도 당연히 종교가 정치이념보다 더 강력한 이념적 집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쏘비엣 유니언을 보더라도 러시아 정교 죽이려고 그렇게 했는데도 결국은 종교에 맑시즘이 먹혔습니다. 한국 기독교식으로면, 성서라는 신화적 텍스트, 그리고 거의 매일 365일 계속되는 종교 의례를 통해서 이념적 강화력이 어느 집단보다 큰 기독교가 아닌가요? 어디 그런 이념 학습하는 정치 집단이 있겠습니까? 거의 매일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 철야예배, 토요일 중고등부 집회, 일요일 새벽기도회, 주일예배, 성가대연습...또 불교로 보면 아예 승려들이 출가해서 평생 수행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종교 자체가 폭력성이 강하기도 하지만 종교와 정치가 결합되었을 때, 즉 권력이 종교를 타락시키는 것같습니다. 현재 한국의 이명박 정권과 개신교의 침묵의 카르텔도 그 예일테죠.
저는 개방적 종교보다는 근본주의적인 종교가 더 확산되기 싶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그러므로 종교의 변화를 통해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지는 않을것 같습니다. 종교의 해악성을 약화시키는길은 \"종교중심의 삶\"을 사는것은 쿨하지 않은 거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북서유럽이나 카나다 처럼 말이죠. 그래도 저런 일이 일어나는건 모 어쩔 수 없지만요.
아... 물론 간접살인은 살인으로 계산하지 않더구만요.
문자주의에 충실해서 그런지 총이나 칼로 사람 죽이는 것만 살인이고 인격살인은 살인으로 간주하지 않더라구요.
일전에 골수보수주의 목사와 잠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연합교회처럼 하면 교인이 줄면 줄었지 늘지 않는다\"라고 하던데 문자주의, 근본주의 종교가 사람 모으는데는 유리한 듯 하더군요.
근데 이 사태에 대한 대한민국 극우의 반응이 또 점입가경입니다. 난 대한민국에 그렇게 많은 <인종주의자>들과 <외국인 혐오단체>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처음 알았습니다. 기가 막히더군요. 숭어가 뛰니까 망둥어가 뛴다더니 대한민국에서 나중엔 별 개꼴값을 떠는 군상들이 다 나온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두 진중권글을 오늘 읽고 외국인 혐오단체에 대한걸 첨 알았습니다... 별로 드러나지도 않고, 설움받으면서 사는 우리나라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혐오단체가 벌써 생기는걸 보면, 나중에 우리나라가 설령 유럽처럼 되면 이분들이 어떤 준동을 하게 될지 두렵네요. (저는 사실 몇몇 북/서유럽에서 무슬림 이민자들의 행동은 그 유럽인들의 가치에 반하는 행동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유럽의 반이민주의 운동이 그렇게 번창하게 된것에 일조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