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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21세기 27] 교회는 이기적으로 믿고 싶은 대로 믿는 무당집이나 점쟁이집이 아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의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정신을 살아내는 삶의 공동체이다!
작성자 늘봄     게시물번호 16431 작성일 2022-09-25 19:43 조회수 2361

예수가 죽은 후 1세기에 출현한 초대교회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으로 믿고 싶은 대로 멋대로 믿고, 기적이 일어나기를 꿈꾸는 무당집이나 점쟁이집이 아니었다. 원초적으로, 교회역사적 예수의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정신을 살아내는 공동체였다. 오늘날 현대 교회예수의 가르침과 삶의 핵심인 새로운 의식 인간성을 살아내고 있는지 대단히 의심스럽다. 역사적 예수 정신을 바르게 인식하는 기독교인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으려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이고 부족적인 종교인이 될 수 없다. 예수기독교인은 자율적이고 창조적이며, 종교체제가 만든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이고 내세적인 교리에 수동적으로 굴종하지 않는 온전한 자유인이다. 주류 사회의 우주진화 세계관을 일상생활 속에서 적용하는 현대 기독교인은 타자적으로 인간과 분리된 인격적이고 초자연적인 객체적 신성을 맹신할 수 없으며, 오직 예수가 가르치고 산 것처럼 새로운 의식 인간성을 온전히 살아내는 사람이다.

 

수백 만 년의 인류진화의 장구한 여정에서, 20만 년 전 출현한 자의식의 호모사피엔스 인간인간됨의 온전함과 완전함을 추구하는 자율적영성(Spirituality)을 본능적으로 추구했다. <예수 세미나>학회의 중추적인 역할로 현대인들에게 하느님이란 말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워준 영국의 신학자 돈 큐핏은 이것을 종교적 요청(Religious Requirement)이라고 밝혔다. 종교적 요청이란 제도적인 종교체제믿음체계가 창작한 보상관계의 필수적인 교리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종교적 요청은 인간이 제도적 종교를 만들기 훨씬 전에 인간의 본능 인간성에서 인식된 영성이다. 영성, 종교적 요청은 지고의 자율적 자기 인식과 자기 초월을 이루도록 요청하는 원리이다. 종교적 요청에 대해서 유영모 선생은, 탐진치(貪瞋癡)로부터 파생된 거짓 자아를 넘어서는 완전한 마음의 순수성, 사심 없음, 고요함, 깊은 명상으로 설명했다. 수천 년 전 고대인들은 참되고 의미있고 자유하게 살아가는 온전한 방식 비전에 대해서 은유적인 표현으로 서사시적인 이야기 곧 신화를 창작했으며, 팔레스타인에 거주했던 유대인들은 그것을 성서하느님으로 기록했다. 결국, 오랜 세월의 진화과정을 통해서 인간창조한 하느님에 대한 종교적이고 사회적 의미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화되어 왔으며, 미래에도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고대인들이 기록한 성서를 왜곡하지 말고, 솔직하고 분명하고 온전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성서를 읽기 전에 먼저 우주진화 역사를 알아야 한다. 교회의 예배와 교육과 선교의 기초는 우주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최근에 나사 항공 우주국이 발사한 제임스 웹 천체망원경은 지구에서 150Km 떨어져 지구 주위를 돌면서 138억 년의 우주진화 세계를 탐사하기 시작했다. 21세기 우주탐사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 초자연적인 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는 우주세계에 속해 있는 인간의 미래와 의미를 심층적으로 탐구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급속도로 고령화되어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기독교인신학신앙이 개인적으로 믿고 싶은 것을 이기적으로 믿는 부족적인 믿음의 행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다른 생물종들과 달리 자의식을 갖춘 생물종이며 완전한 정신적 정직성, 마음의 순결함, 삶의 온전한 변화를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영성 종교적 요청을 지니고 있다. 종교적 요청은 종교체제가 이분법적이고 내세적이고 관념적인 믿음교리 전통 따위의 맞춤형으로 변형시킬 수 없는 인간존엄성이고 정체성이다. 따라서 종교적 요청에는 숨겨진 비밀과 거짓과 은폐는 있을 수 없으며, 특히 초자연적인 망상의 존재에게 수동적으로 의존하여 보호와 축복과 구원을 바랄 수 없다. 종교에 속한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숨겨 두었던 것과 잊혀졌던 것들과 정면으로 대면하는 것이며, 그것을 회피하면 진실하게 종교적이 될 수 없으며, 참되고 온전한 인간이 될 수도 없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가 가장 싫어하고 반대했던 것이 바로 성전종교부정직불순함새로운 변화를 회피하는 가식적인 행태였다. 그런데 괴상하게도 오늘 교회는 예수가 철저히 거부했던 종교적 믿음을 추종하고 있다. 예수가 가르친 인간의 본능적인 종교적 요청, 우리의 마음을 탐색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우리를 잘 알기 때문에 내 안에 내면적인 장벽을 세워 자의식을 가로막던 장벽을 부셔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도전한 종교적 요청, 참된 인간이 되어 사람답게 사는 것이었으며, 암흑 속에 감추어진 거짓가식불평등 불의를 밝은 빛 가운데 노출시키고 끄집어 내는 것이었다. 예수종교적 요청,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존재와의 관계들을 생각하도록 촉구했다. 예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인식하고 비판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을 통해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는 구원에 이르게 되는 길을 인식하도록 격려했다. 예수 종교적 요청은 부족적이고 이기적이고 내세적인 성전종교가 만든 믿음체계에 정반대되는 대안이었다.

 

종교(Religion)는 자기가 믿고 싶어하는 것 만을 믿는 부족적이고 이기적인 행태가 아니다. 종교하느님을 믿는 믿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됨과 이에 따르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허무함, 분노, 두려움, 공포, 이기적 욕심 같은 것들로 채워진 자기 기만이 될 수 없다. 특히 21세기 교회는 자신을 속이는 허구적이고 부풀어진 거짓된 자아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기독교인들이 교회로 모이는 것은, 오직 예수 종교적 요청을 인식하고,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을 살아내기 위해 자신의 편견과 오만을 부수기 위한 것이다. 예수종교적 요청,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높이 쳐들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초자연적인 힘에게 이기적인 보상심리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 아니며, 체제의 권위 앞에 인간의 자율성과 창조성과 잠재력과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에게 솔직해야 한다. 원초적으로, 참 사람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삶의 모습이 동기가 되어 탄생한 기독교는 인격신론의 초자연적 하느님의 전지전능함에 의존하고 맹신하는 교리적종교가 아니다. 예수그런 하느님존재를 맹신하는 성전종교가 사람들을 차별하고 수동적인 노예로 구속하는 것을 철저히 반대했으며, 그런 하느님믿음에 대한 이분법적 교리와 전통에 대해서 가르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예수가 말한 것처럼 말하고, 예수가 산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 부르며, 이들의 예수 공동체교회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기독교라는 종교체제가 탄생하기 전에 먼저 참 사람 예수 정신을 따라서 예수처럼 살려는 사람들의 공동체들이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시작되어 시리아, 아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페니키아, 소아시아, 요르단이집트 같은 근동 지방에 생겨났다. 그리고 기독교 4세기 무렵에 이르러 군사적이고 폭력적인 로마제국 국교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는 교회를 세우거나 기독교라는 종교체제를 세우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1세기에 예수불평등의 불의를 합리화하는 종교 정치가 차별주의와 우월주의와 황금만능주의로 대다수의 민중들을 가난과 질병의 고통과 절망 속에 빠트리는 것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철저히 항거했다.

 

예수의 신학과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예수성전종교를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하늘 위에 존재한다는 하느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인간을 폄하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믿음 종교가 강요하는 차별적이고 이분법적이고 내세적인 교리를 가식과 거짓의 회칠한 무덤으로 규탄했다. 예수종교체제가 만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철저히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런 믿음은 깨끗하고 건강하고 순종적인 사람만이 구원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며, 교리적 믿음이라는 필수조건이 따르는 보상심리의 유치한 행태였기 때문이다. 예수참된 인간이 되어 사람답게 사는 온전한 을 살아가기 위해서 그런 믿음은 불필요하며 오히려 장애물이 된다고 가르쳤다. 오늘날 21세기에 많은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의해서 선별된 사람만이 하느님의 보호와 축복과 구원을 받고, 죽은 후에 이 세계를 떠나서 다른 세계로 이주해갈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다. 무엇보다도 그런 믿음 불량신학 때문에 인간 존엄성이 무시되고, 그것으로 인한 여성차별과 인종차별과 빈부차별과 종교차별이 인류사회를 극심한 분열과 혼돈의 구렁텅이로 몰았다. 예수는 하느님을 믿기 위해서 성전(교회)에 열심히 다니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오늘 예수가 여기에 있다면, 그런 믿음의 노예가 된 교회를 허물어 버리라고 도전할 것이 분명하다.

                                                                            

신약성서의 복음서들에 따르면, 예수는 사람들을 부른다. 물론 예수의 목적은 사람들을 모집해서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교회를 세워서 대형교회로 만들고, 세계를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화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역사적 예수는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충실한 유대교인이었고, 예수가 살아있는 동안 기독교 교회는 아직 탄생하지도 않았다. 예수가 제자들을 부른 목적은, 종교개혁 사회개혁을 통해서, 지금 여기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성서전통에 따르면, 예수가 제자들을 부른 목적은 교회를 세우고 확장하는 선교전략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정신에 따라서, 버림받은 사람들, 소외당한 사람들,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의 현장을 찾아가서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평등 정의와 연민의 사랑이 실현되는 세상을 건설하라는 것이었다. 예수 제자도는 다른 사람들을 조건없이 사랑하고 포용하는 연민의 사랑을 세상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며, 이것이 초대교회의 신학과 신앙이었다.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은, 예수의 신성을 믿고 다른 종교인들을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 자신이 참된 인간으로 거듭난 후에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개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서에 역사적 예수 정신에 반대되는 내세적이고 이분법적이고 부족적 믿음이 기록된 것은 예수가 죽은 후 수십년에서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가면서 성서 원본은 실종되었고, 많은 필사가들에 의해서 수많은 사본들이 필사되는 과정에서, 심하게 왜곡되고 수정첨삭으로 주관적인 믿음이 삽입되었다. 따라서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 비평학적재해석이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제도적인 교회를 세우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지금 여기에서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상호의존관계의 삶을 이루는 생명의 공동체를 살아내라고 도전했다. 예수는 평범한 민중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혹독한 징수제도와 제국적인 농업정책과 중앙통제의 경제정책과 종교적인 정결법이나 십일조와 같은 비상식적인 율법에 더 이상 억눌려 살지 말고 항거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으라고 도전했다. 예수믿음을 가르치는 목사나 주일학교 교사가 아니라, 종교와 정치를 철저히 개혁하는 사회혁명가였다. 예수는 로마제국이 통치하는 세상을 뒤집어 엎어 평등 정의 하느님이 통치하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라고 촉구했다.

 

예수가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 건설 운동을 전개한지 2천년이 지난 21세기의 세상 현실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오늘 세상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2천년 전의 예수의 세상과 무엇이 달라졌나? 예수를 믿는다는 교회들이 동네 방방 곳곳에 세워젔는데 우리의 가정과 사회는 무엇이 달라졌나?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절대빈곤 인구 9700만 명 늘어났다. 2021년 현재 세계은행이 추산하는 절대빈곤 인구는 7 1 100만 명이다. 절대빈곤이란 하루 2달러 이하의 돈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예수가 오늘 여기에 살아 있다면, 전 세계 인구 77억의 10%가 절대빈곤으로 고통과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상황을 못 본체하고, 신자들에게 예수를 열심히 믿고 죽은 후 천국에 올라갈 준비에나 열중하라고 할 것인가? 절대로 아니다! 예수는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을 향해 가슴을 치면서 실망과 울분을 터트릴 것이 틀림없다. 안타깝게도 오늘 예수가르침과 그의 모습교회 안에서 찾아보기 대단히 어렵다. 오히려 교회 밖에서 비기독교인들과 무신론적 인도주의자들의 삶의 모습들에서 예수의 우주적이고 개방적이고 자율적인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역사적 예수정신을 인식하고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고 책임이다. 21세기 교회의 설교와 교육 프로그램에서 과학이 발견한 우주 이야기를 모호하게 불분명하게 말하거나 종교적 믿음체계맞춤형으로 변형시키는 유치한 행태는 더 이상 설득력과 효력이 없으며 오히려 교회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을 초래할 뿐이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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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icca  |  2022-09-26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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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치(貪瞋癡)로부터 파생된 거짓 자아를 넘어서는 완전한 마음의 순수성, 사심 없음, 고요함, 깊은 명상"

목사님 글을 읽다보면, 예수의 말씀이 부처의 가르침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허긴 제 생각의 경지를 넘어서신 분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지, 제 맘데로 추측 해봅니다^^

목사님, 혹시 아래 성경구절에 대해서 자세한 말씀 가능하실지? 문의 드려봅니다. 여기서 "I"를 어떻게 해석해야하나요?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John 14:6

늘봄  |  2022-09-26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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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글을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님께서 질문하신 것에 대해서 제가 할 수 있는대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구절이 교회에서 심하게 왜곡되어서 많은 교인들이 예수와 성서에 솔직하지 못한체 교회가 만든 공식들을 열심히 암송하고 있습니다.

님의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지금 짧게 답하기 보다는 좀더 준비해서 곧 말씀드리
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입니다.

ross  |  2022-09-26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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