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그냥 심심해서 끄적거리는 궤변일뿐입니다.
유물론자가 세상을 바라보며 뇌내망상하는 글입니다. 따라서 어떤 분들에겐 불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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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출산 육아
1. 출산율이 곤두박질 치는 원인
2. 행복한 난교 시대의 종말과 일부다처제의 등장
3. 일부일처제 = 더 많은 섹스(구제 : 인구 폭발, 일부일처제, 홍길동, 연산군, 박정희)
4. 대박! 결혼이 취소가 된다고? - 이혼의 위대한 재발견
마지막 글(일부일처제 = 더 많은 섹스)이 재미없다고 아내에게 까였다. 그냥 사실의 나열에 불과할 뿐이란다. 내가 무려 끝에 "흥!" 까지 넣었는데도 까이다니 슬프다. 하긴 다시 읽어보니 꼭 공부하는 글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쫌만 까불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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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어 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이 할머니 틀림없이 카이사르와 사랑에 빠졌어!
21세기 일본 여자까지 홀려 버린 마성의 사나이 카이사르가 활동한 기원전 로마로 가보자. 왜냐하면 거기엔 인류가 최근에야 겨우 되찾아낸 보물 "이혼" 이 있었거든.
로마는 아마도 최초의 선진국일 것이다. 현대 국가의 상상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로마로부터 비롯됐다. 지구를 몇 바퀴나 둘러쌀 정도의 도로 시스템이 있었다. 상하수도 시스템이 있었다. 재판에서 피고를 변호할 변호사 제도가 있었다. 신문이 있었다. 출판업이 있었다. 금융업이 있었다. 아파트가 있었다. 빌딩 건축시 고도 제한이 있었다. 현대 도시마다 있는 각종 경기장이나 스타디움은 로마의 콜로세움을 흉내낸 것이다.
현대의 많은 부분이 로마에 빚지고 있다. 소대, 중대, 대대, 사단으로 구성되는 현대 군대 시스템은 로마의 군단병 시스템을 차용한 것이다. 근현대 국가들은 로마처럼 되고 싶어 했으며 지금도 로마처럼 되고 싶어 한다. 로마의 휘장은 독수리였다. 그래서 독일 나치의 휘장도 독수리였고 현대 미국의 상징도 독수리다.
그리고 오늘의 주제 : 로마에는 무려 "이혼" 이 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이혼은 점차 역사에서 사라졌다. 다만 여자를 집에서 추방한다는 의미만 있었을 뿐이다. 남녀가 같은 권리로 결혼을 취소할 수 있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20세기 중반까지도 남편의 폭력은 이혼 사유가 아니었다.
이제 자세히 들어가 보자.
위에서 말한 멋들어진 것들이 많이 있던 기원전 로마는 한 가지 없는게 있었다. 남들은 다 있는데 로마만 없는 것이었다. 바로 왕이 없었다. 카이사르가 활약할 당시 로마는 공화정이었다. 정치는 원로원과 임기제의 집정관 그리고 호민관이 맡았다. 집정관과 호민관이 되기 위해선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야 했다. 원로원 의원들과 호민관과 집정관이 정치 현안을 놓고 이전투구를 벌였다. 대단히 세속적인 국가였던 것이다.
이천년 넘게 시간이 흘러서까지도 일본 여자의 사랑을 얻을만큼 카이사르의 마성은 엄청났다. 카이사르는 유부남이면서도 엄청나게 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얼마나 심했냐 하면 그의 군단병들이 개선식에서 이런 노래까지 불렀다
… 갈리아를 무찌르고 개선하신 카이사르가 납신다! … 대머리 난봉꾼 카이사르가 납시니, 로마인들이여, 어서 마누라를 숨겨라! …
참고로 카이사르는 대머리라고 불리는걸 극히 싫어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단병들이 이런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와 군단병 사이에 오랜 정벌 기간 형성된 끈끈한 전우애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들이 있었기에 그는 훗날 '주사위는 던져졌다' 를 되뇌이며 루비콘강을 건널 수 있었다.
다시, 그의 난봉꾼 기질로 돌아가서,
심지어 그는 그의 정치적, 재정적 후원자인 크라수스의 아내까지 건드렸다. 이제 여기서 이상한 부분이 드러난다. 크라수스는 자신의 아내가 카이사르와 바람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정치적 재정적 지원을 끊지 않고 계속했던 것이다. 그 외 카이사르에게 아내나 딸을 욕보인 원로원 의원들하고도 말싸움 정도나 했지 크게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끊임없는 여성 편력은 그의 정치적 커리어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아마 크라수스와 카이사르 사이에 이런 정도 대화가 오고갔지 않았을까?
'야, 이 자식 감히 내 마누라까지 건드려? 죽을래?'
'아유, 형님, 죄송하게 됐습니다. 본의 아니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너 또 한번 그러면 국물도 없을 줄 알어, 임마.'
그리고 아마 크라수스와 그의 아내 사이에는 이런 대화가 오고 갔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떻게 카이사르 아우와 그럴 수가 있어?'
'밥 먹다가 반주삼아 포도주 좀 마시다 보면 여자가 그럴 수도 있지, 남자가 돼 가지고 그거 하나 그냥 못 넘겨요?'
이런 분위기가 아니면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근데 이런 분위기가 맞는 것 같다. 로마인들의 결혼과 이혼에 대한 태도를 보면 이런 분위기여야만 한다.
카이사르, 크라수스 그리고 폼페이우스가 1차 삼두정치체제를 확립했을 때인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2차 때였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중요한 건 아니고 정치적 동맹을 위해 서로서로 결혼 동맹을 맺었다. 내 딸이 쟤한테 시집가거나 쟤 여동생이 내 신부가 되거나 뭐 그런거다. 여기서 또 지금의 기준으로 말도 안되는 결혼과 이혼이 일어난다.
내가 상대와 결혼 동맹을 맺기 위해 나는 일단 이혼을 한다. 그리고 상대의 딸이 나에게 시집을 온다. 문제는 상대의 딸이 이미 기혼인 상태였다. 더구나 애도 있다. 그런데 전혀 문제가 안 된다. 결혼 동맹을 위해 상대의 딸도 쿨하게 이혼을 하고 나와 재혼하는 것이다. 현대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결혼과 이혼이다.
아마도 로마에선 결혼과 이혼과 불륜이 인생사에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이벤트인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로 모든게 바뀌었다. 뭔가 쿨하고 경쾌한 느낌의 로마인들이 엄숙해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일반 군단병들이 로마의 최고 권력자에게 대머리 난봉꾼 이라고 놀리는 일이 없어졌다.
아이가 태어나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노인이 죽으면 교회에서 장례를 치렀다. 남녀가 결혼을 교회에서 했다. 결혼이란 신이 두 남녀를 맺어준 신성한 것이 되었다. 신이 맺어준 걸 인간이 끊을 수는 없었다. 기독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혼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자에게 암흑기가 이어졌다. 죽도록 이혼이 하고 싶었던 영국의 어떤 왕은 국교를 카톨릭에서 성공회로 바꾸면서까지 이혼을 했지만, 여자는 더 오랜 기간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다.
여자도 이혼을 남자와 동등하게 요구할 수 있게 된 것은 현대에 들어서다. 오랜 기간 빼앗겼던 권리가 가까스로 획득됐고 장기간 억눌렸던 그 반발로 이제 이혼은 일상다반사가 됐다. 더 이상 근본적인 의미의 일부일처제가 아니다.
이제 결혼은 신성하지 않다. 그러나 극히 최근에 획득한 이 '이혼할 권리' 야말로 신성하다. 사람이 신으로부터 독립하여 다시한번 독자적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는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크게는, 인류의 반쪽, 여성이 자립하기 시작했다는걸 상징하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