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대 사학자들은 박정희 쿠데타로 시작된 한국의 무신정권이 언제 끝났을 거로 정리할까?
조금 성급한 이들은 김영삼 정권을 말할 것이고 일반적으로는 김대중 정권을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일부는 김대중도 충청 지역 군벌 김종필과 손을 잡았다며 진정한 문민 정부는 노무현부터 시작했을 거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자칭 좌파 빨갱이인 나는 노무현 정부부터 진정한 문민 정부라고 주장해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김영삼 정권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가 3당 합당이라는 야합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일반 소시민으로 살아오면서 나는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시대가 바뀌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김영삼이 청와대에 앉아 있을 때 나는 과천의 빌라촌 3층에서 살고 있었다. 빌라촌 주변으로는 고층 아파트가 즐비했다. 그 당시 아내는 오늘 내일 하는 만삭이었던가? 젖먹이를 기르고 있었던가? 했었고 나 홀로 서울로 출퇴근을 했다.
어느 날 지하 상수도관이 터져서 대규모 단수가 발생했다. 급히 복구 공사가 시작되어 중장비들이 내가 살고 있던 빌라의 옆 도로를 파헤쳤다. 물 공급을 위해 급수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아내는 급수차가 올 때마다 양동이로 물을 담아 빌라 3층까지 퍼날라야만 했다.
일요일이 되어도 공사는 계속되었고 어김없이 급수차가 도착했다. 아내 대신 내가 물을 몇 번 길어 올려 보니 젖먹이를 기르는 여자에게 만만한 일이 아닌 것을 알게 됐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법. 그저 빨리 상수도 공사가 끝나길 기다릴 뿐이었다.
며칠 후 퇴근하고 보니 파헤쳤던 부분을 포크레인이 다시 덮고 있었다. 공사가 끝났는가 보다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근처의 공무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물었다.
“공사 끝났어요? 이제 물 나오나요?”
공사를 감독하던 공무원은 늦게까지 퇴근을 못하던 상황이 짜증 났는지 나를 힐끗 보고는,
“공사는 끝났는데 이 동네는 아직 멀었어요.”
라고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나는 이게 말인지 방귀인지 몰라서 얼굴에 ‘??????’ 를 띄우고 그를 빤히 바라봤다.
“아 거시기, 저 아파트 단지 옥상 물통하고 아파트 변기통 물이 몽땅 다 찬 다음에 물길이 여기로 온다구요. 그게 며칠 걸릴지 몇 주 걸릴지는 나도 몰라요. 원 참!”
그가 짜증을 내며 해 준 말이었다. 그의 부하 직원으로 보이는 두 명의 남자가 낄낄거렸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컴퓨터를 켜고 모뎀을 연결하여 PC 통신에 접속했다. 김영삼 정부는 국민과 직접 소통한다며 청와대 페이지를 만들어 두었다. 나는 건의함 이었나? 국민신문고인가? 하는 게시판에 접속해 글을 올리기 전 요구하는 정보, 이름과 주민 번호와 주소 같은 것, 을 입력한 다음 동네의 상황을 단조롭게 적어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엔 “최소한 급수 재개 일정을 알아야 내 아내가 젖먹이와 함께 친정에 머물지 계속 이곳에서 기다릴지 결정할 수 있을 것 아니냐” 정도로 끝맺은 걸로 기억한다.
다음 날 일 때문에 늦게 퇴근했다. 이미 어두워진 후였는데 집에 도착하니 불을 환하게 밝히고 어제 덮었던 곳을 다시 파헤쳐서 공사를 하고 있었다. 뭔가 잘못되어 재공사 하는가 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집에 들어가 간단히 씻고 늦은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아내가 연 문 틈으로 어제의 그 공무원이 빼꼼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밤 늦게 죄송합니다만, 지금 물이 나오는지 확인해 주시겠어요?”
주방에서 밥 먹던 나는 젓가락을 든 채 싱크대 수도를 틀었다. 수도꼭지는 푸쉬식 방귀를 뀌더니 곧이어 물을 콸콸 쏟아냈다.
“물 잘 나오죠? 식사하시는데 실례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어제와는 딴판으로 예의 바른 그의 뒤로 어제 그 옆에서 낄낄거리던 두 사람이 역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문을 닫고 나는 아직 입 안에 있는 음식을 우적거리면서 아내와 눈을 마주치며 이게 뭔 상황인지 서로 의아해했다. 아무래도 내가 힘없는 공무원들에게 큰 갑질을 해 버린 모양이었다.
확실히 김영삼 정부부터 국민 위에 군림하는 정부에서 봉사하는 정부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와, 그를 이어받은 전두환 군사 정부에 의해 나는 유사 병영 국가에서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냈다. 교과서는 물론 정부 홍보물이나 관변 단체 영상물에는 항상 군관민이 협동하여 어쩌고저쩌고 하는 내용이 많았다. 대충 김영삼 때부터 군관민이 민관군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현재는 민관군이 뭔가를 하자는 말을 안 한다. 명목상 군은 그저 외세의 침략에 대비할 뿐이고 관은 민을 위해 봉사할 뿐이다.
유년시절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놀다 보면 저녁 무렵 국기 하양식이 있었다. 갑자기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아침에 걸어 두었던 태극기를 내리는 것이다. 꼬맹이들은 공을 차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내려지는 국기를 바라보며 경례를 해야만 했다.
중학교 때부터 일본 제국군 비슷한 교복을 입고 걸핏하면 아침 조회를 했다. 태극기를 향해 거수 경례를 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받았다. 교실에선 박정희가 썼다는 국민교육헌장인가 뭐시껭인가 하는 거를 암기해야 했다.
고등학교 때는 유사 군복인 교련복을 입고 군사훈련을 받았다. M1 개런드 소총 분해 결합을 배웠고 사격 예비 훈련을 했으며 총검술과 제식 훈련 및 수류탄 투척 연습을 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교련 수업을 명목으로 사상교육과 군사훈련이 계속됐다. 1학년 때는 일주간 문무대에 끌려가 사격, 막타워, 유격, 각개전투, 화생방 등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받았다. 2학년 땐 또 일주일간 동부전선으로 끌려가 북쪽을 향한 대북 확성기 방송을 들으며 밤새도록 경계를 섰다.
극장에라도 갈라치면 영화 본편을 보기 전에 지루한 국정 홍보 영상을 봐야 했으며 애국가가 올려 나올 동안 기립해서 가슴에 손을 얹어야 했다.
박정희, 전두환 같은 근본 없는 잡것들은 이렇게 국민들에게 충성을 강요했다. 그리고 이 모든 촌스러운 작태는 행정부 수반을 국민이 직접 뽑으면서 사라져 갔다.
예전엔 국회의원 총선 후에 신문이나 방송에서 결과를 보도하면서 끝에는 “한편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서 군부의 반응은…” 라는 식으로 끝맺었다. 즉 전 국민이 선거 후에 군부의 눈치를 봤다는거다. 이 악습을 끊은게 나는 김영삼이라고 생각한다.
김영삼은 삼당 합당을 하면서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확실히 그는 그의 말을 지켰다. 전두환, 노태우의 쿠데타를 성공시킨 군 사조직인 하나회를 전격 숙청했으며 두 반란 수괴를 법정에 세워 투옥했다.
그리고 삼엄한 박정희 군사정권 치하에서 목숨을 건 민주화 운동을 한 그 답게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이제는 당연시되는 금융실명제, 지방자치제 등이 그의 작품이다. 권위주의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국민에게 봉사하는 정부를 표방하는 단초가 됐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했으며 일본 정계에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 라며 패기 있는 일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영삼의 유산은 그 당에 남지 못했다. 김영삼을 따라 들어간 추종자들은 모두 사라졌고, 현재 “국민의 힘” 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불리는 당은 그저 친일파를 조상으로 하는 이익 집단일 뿐이다.
그 집단에서 김영삼 이후로 등장한 후임들은 참으로 참혹하다.
기업가 출신 이명박은 알뜰살뜰 해 쳐먹다가 뇌물과 횡령으로 징역 17년을 받았다. 특사로 나온 지금 쥐 죽은 듯 살고 있다.
박정희의 후광을 등에 업은 박근혜는 일반 여염집 아낙의 아바타였음이 밝혀졌고 결국 탄핵됐다. 그리고 징역 20년을 받고 역시 감옥에 갇혔다. 현재 특사로 풀려 나와 칩거 중이다.
마지막으로 정치검사 출신 윤석열. 선거 운동할 때 부터 전두환을 찬양했으며, 차지철, 전두환, 노태우를 숭배하는 고등학교 후배 출신 군장성들과 이른바 충암파라는 또 다른 하나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2024년 12월 3일 친위 쿠데타를 실행했다.
하루 빨리 전임 이명박과 박근혜처럼 감옥에 처박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