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삼층 세계관이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현대인들에게 혼돈을 일으키고 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고대 성서의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읽으면서 과학책 또는 역사책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성서는 은유적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성서를 바르게 해석하려면 성서 저자들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형식과 목적으로 성서를 기록했는지에 대한 성서 비평(역사 비평, 양식 비평, 문학 비평, 편집 비평, 전승사 비평, 등)이 필요하다. 창조론을 믿는 극소수의 과학자들은 창세기 1-2장의 창조 이야기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고대의 성서 저자들은 현대 과학 즉 138억 년의 우주진화 이야기에 대해 상상도 못했다. 인류 역사에서 ‘과학’이란 말과 그 개념은 17세기 이후 뉴톤이 중력의 법칙을 발견한 때부터 쓰여지기 시작했다. 성서는 과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오직 시적으로 기록된 신화적인 책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렇게 말한다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서에 솔직하고, 21세기에 하느님의 의미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깨달아 알 수 있다.
기독교 성서 창세기 1장의 천지가 창조된 이야기 (참고: 창세기 2장의 인간이 창조된 이야기는 1장의 이야기보다 먼저 기원전 1000년 경에 기록되었다.) 는 대략 바벨론 유배시기 (기원전 587년) 전후이다. 바벨론 제국의 등장으로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시기에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민족의 새로운 정체성과 민족이 단결할 수 있는 신앙이 필요했다. 따라서 성서를 재편집하고 새로운 하느님의 이미지를 정립했다. 이것이 창세기 1장의 역사적 배경이다.
창조주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는 이야기는 오직 기독교 성서에만 있는 유일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형태의 신화(神話 Myth)는 고대 중근동 지역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문학 형식이었다. 고대인들은 자연 현상들과 삼라만상에 대한 호기심들과 경이로움과 황홀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신화라는 문학적 장르를 사용했다. 창세기의 삼층 세계관은 당시 고대 중근동의 수메르 지역에 거주하던 메소포타미아인들의 보편적인 신화적 세계관이었다. 또한 수메르 지역은 고대 중근동 신화들의 고향이었으며,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고향이 수메르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던 우르(Ur)였다. 아브라함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해 온 후에도 후손들은 여전히 당시 중근동 지역에서 보편적이었던 삼층 세계관과 신화적 문화 속에서 살았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뿌리인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은 삼층 세계관의 메소포타미아 문화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따라서 고대 이스라엘의 세계관과 종교 역시 중근동 지역의 삼층 세계관과 문화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1-2세기에 기록된 신약성서도 자연스럽게 고대 중근동의 삼층 세계관에 근거해서 기록되었다.
고대 삼층 세계관이 기독교 신학에 영향을 미친 몇 가지 실례를 소개한다. 5세기에 만들어진 사도신경은 기독교 신학의 골격을 이루어왔다. 사도신경은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조론을 고백한다. 그리스도론의 성격을 결정한 사도신경의 세계관은 갈릴레오 이전 사람들의 눈에 비친 삼층 세계관이다. 예수가 성령으로 동정녀에게서 잉태했다는 것은 바로 삼층 세계관에서 가질 수 있는 필연적인 표현이다. 즉 상층인 하늘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중간층으로 사람의 몸을 타고 내려온 하느님이 예수이다. 여기에서 성육신 또는 임마누엘 사상이 생겼다. 성육신한 예수는 인간의 영역에 들어왔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처형되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삼층 세계관에 따라 죽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올라 하느님 우편에 앉아 있다가 최후심판을 집행하러 다시 땅으로 내려와서 모든 인간들을 상층(천당)행과 하층(지옥)행으로 결정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종말론은 지극히 삼층 세계관적 신앙이다.
삼층 세계관이 기독교 신학에 미치 가장 심각한 영향은 이분법적 구원론과 내세와 영생에 대한 꿈이다. 고대인들은 보편적으로 생각하기를 상층에서 영생하는 신들이 땅과 하늘 사이를 마음대로 오르락 내리락하고, 중간층에는 유한한 생명의 인간들이 산다고 상상했다. 삼층 세계관의 고대인들은 상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따라서 사도신경에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라는 고백을 삽입했으며, 영생의 길은 예수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 것을 입술로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간단하면서 대단히 위협적인 공식이다. 그러나 우주 진화적 세계관에서 사람의 생명과 생애를 ‘산다 죽는다’ ‘구원받는다 징벌을 받는다’ 는 이원론적 표현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각 사람의 삶은, 한 인간의 현상 또는 한 인간의 운명의 현상 또는 한 인간의 존재의 현상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진화 이야기)에서 우리의 생명과 생애를 인간에게만 국한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138억 년 전 빅뱅 이후 우주의 모든 개체들은 하나의 생명의 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개체들은 소중하고 성스러우며, 어느 한 개체를 무시하거나 제외시킬 수 없다. 개체들이 모여 전체를 이룬 것이 우주이다. 한 개체의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다른 개체들과 전체를 위한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나 삼층 세계관적 신앙이 주장하는 최후의 심판은 오직 인간의 삶과 죽음에 국한시킨다. 죽는다는 것은 인간이 살고 있는 땅 아래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고, 산다는 것은 죽었던 몸이 부활해서 다시 살아나 상층인 하늘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우주진화 세계관적 신앙은 세계를 상중하 층으로 분리하지 않기 때문에 종말론적 최후심판이 없다.
아인슈타인에 이르러, 이미 갈릴레오에서 시작되어 뉴턴을 거쳐 온 삼층 세계관은 아무 쓸모 없는 낡은 휴지로 전락하게 되었고, 세계를 상중하의 층없이 물질이라는 것이 활동하는 광활한 공간으로 보게 되었다. 오늘날 우주 진화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 가운데 신/하느님을 전제로 하는 사람은 없다. 생물과 무생물의 한계도 없어졌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 질서로서 가치관이나 윤리 규범을 지킴으로써 자기 자리를 찾는 존재가 아니라, 무한한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써 두려움과 욕심없이 자유하게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선포했다. (참고: ‘The Hidden Heart of the Cosmos: Humanity and the New Story’, Brian Swimme)
우주진화적 신앙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그렇다고 인간 중심의 생명 영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양에서 특히 인도에 원초를 둔 불교에서는 생명을 모든 생명체들에게 확대시킨다. 우리가 말없는 생물들을 다 정복해 버리고 인간 중심적 사고로 내가 살기 위해서 다 먹어치운다면 생태계가 깨져서 인간도 살 수 없다. 놀랍게도 바울에게서 우주진화적 신앙을 볼 수 있다. 로마서 8장 18절 이하에 생명의 지평을 인간 영역을 넘어서 모든 생명체들에게 확대시키고, 우주적인 생명, 우주적인 구원을 말하고 있다. 모든 생명체들이 신음하고 죽임을 당하는 고통을 당하면서 인간의 손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참 인간의 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