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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이면 감천 _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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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밖에 나가니까 그 집 남자가 왔다갔다하면서 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사람을 불러서 할말이 있으니 너 우리 방에 잠시만 들려달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들어왔다. "너희는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이곳 캐나다는 세계 각 나라에서 모인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각자 자기 나라의 음식을 해먹고 사는데 네 부인이 우리 음식 냄새가 싫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인사했을 때 받지도 않는 것은 확실한 인종차별이 아닌가 무슨 조처가 있어야지 내가 화가 나서 안 되겠다.” 하니까 그사람 말이 "나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하지만 나의 부인은 나한테도 항상 화를 내고 있다." 라고 한다. 내자신도 모르게 나의 화난 얼굴이 웃는 얼굴로 변하도록 풀어주고 나간다. 그 다음날, 내가 식료품들을 사서 차에서 꺼내서 내 방으로 옮기는데 그 여자가 어디서 보았는지 "Hi" 하고 쫓아와서 봉지들을 방으로 들어다주면서 친절을 베푼다. 확실히 자기 자신의 권리를 위해서 싸울 만한 것이다. 밤근무로 병원 사무실에 가서 일을 하고 아침에 돌아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 한숨 눈을 부치고는 집을 보러 다녔다. 삼 개월 후 아이들 학교도 가깝고 방이 세 개인 아주 참한 집을 사서 이사를 하고 애들 아빠도 북쪽에서 그 지겨웠던 광부 생활을 끝내고 내려왔다. 빈주먹으로 어린 삼남매 데리고 낯설고 땅설고 말설은 이곳 만리 타국에 흘러와 5년 만에 내 집을 장만한 것이다. 물론 융자를 좀 받았어야 했지만 내 집이 생긴 것이다. 남편이 북쪽에서 돌아온 날 남편의 품에 얼굴을 묻고 그 동안 힘들었던 모든 사연을 털어놓으며 행복한 울음을 터트렸다. 그 후 한 삼 년 동안 애들 아빠는 이곳 회사에서 그리고 나는 다시 이곳 정부의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애들과 집안일을 돌보았다. 늘어지는 남편을 밀어 내 사업을 시작해볼 결심을 했다. 연쇄상점인데 조금만 돈을 주면 상점주인(Dealer)이 되어 가게 하나를 맡을 수가 있는 것이다. 어디나 인간세계는 다 같기 마련이다. 그 감독을 불러내어 점심을 사면서 좋은 가게를 하나 붙들었다. 우리 내외는 가게의 ‘가’ 자도 모를 정도로 장사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뛰는 것이다. 힘은 들었어도 재미있을 정도로 가게는 바빴다. 아이들도 부모의 정성스런 사랑 속에 무럭무럭 자랐다. 학교가 5분이면 가고 올 수 있는 거리이다. "우리 엄마가 세계에서 일등 가는 요리사야!" 점심 시간이 되면 부지런히 집으로 달려온 막내가 엄마가 차려 주는 점심을 맛있게 먹으면서 하는 소리다. 그 가게를 맡아 5년을 뛰자 빌렸던 돈도 다 갚아지고 그리고 내 가게를 장만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남의 상점 맡아 해주는 상점주인생활을 청산하고 내 가게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이자도 꾼 돈도 갚는 것이 없이 팔리는 대로 순수입이 되는 것이다. 이젠 생활이 안정되고 큰 아이와 둘째가 대학교에 그리고 막내가 고등학교 삼 학년이 되었다. "따르릉" 전화소리에 기절이라도 할 듯 놀라 일어나서 "Hello"하고 전화를 받았다. 1987년 3월 6일 새벽 두시 십오분, 병원에서 온 전화다. 몇 달간 고통을 겪던 애들 아빠가 식구들 다 집에 보내놓고 혼자서 조용히 운명한 것이다. 애들 아빠는 서울 일류대학 출신이었다. 아는 것이 많았고 두뇌도 명석한 사람이었다. 아빠를 닮아서 세 아이들도 모두 학교에서 우등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키가 육척에 감기도 한번 안 앓던 사람인데 그 해 무엇인지 본인이 느끼는 것이 있었기에 의사를 찾아갔을 것이다. 엑스레이를 수십장을 찍고 검사를 한 후, 암이라고 진단이 나왔다. 날 벼락이라는 말이 있다. 아마도 우리 가족의 경우를 두고 나온 말인지도 모르겠다. 하늘이 캄캄한 것 같았다. 병든 남편 간호에다 애들 삼남매, 도저히 가게를 감당 할 수없는 상태이고 보니 그리고 급한 상황이고 보니 가게를 반값에 처분하고 말았다. 남편이 가기 전 집으로 데려와 간호를 하였다. 정말로 힘들었다. 눈뜨고 새운 밤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남이 알게 모르게 통곡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집에서 몇 개월 견디다가 상태가 악화 되어 다시 병원으로 옮겨야했고 결국은 허무하게 떠나고 만 것이다. 온갖 정성과 공을 드려 가꾸고 쌓아온 우리가족의 소중한 삶을 밤사이 몰래 찾아온 못된 장난꾼의 요령에게 짓밟혀버린 비참한 심정…. 서럽고도 분하였다. 고생을 고생으로 생각지 않고 극성스럽게 살아왔다. 이제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자리잡고 살만하니까 애들 아빠가 가버린 것이다. 어지간히 복도 없는 양반이다. 이민생활 20여년에 그리던 고향땅도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만사가 다 귀찮았고 매사가 집중이 안 되었다. TV를 보아도 책을 읽어도 무엇을 보고, 읽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의사의 말이 공포증(Panic Attack)이란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숨이 막힌다. "애들 아빠를 내가 땅에 묻어 저 양반이 숨을 못 쉴 터인데" 하는 생각이 목을 조르는 것이다. 창문을 열어놓아도 그리고 문을 열어놓아도 숨이 막 넘어가는 듯 질식하는 것 같다. 대학교 일학년이던 딸아이가 학교를 일 년 쉬면서 엄마의 병간호를 해주었다. 일 년이 가고 이 년이 가고 새록새록 마음의 창문을 두드리는 모든 기억들이 나를 울리고 괴롭혔다. 특히 남편이 가장 필요로 했을 그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던 남편을 지켜 주지 못한 죄의식이 자신을 용서 못하는 나를 미치도록 괴롭혔다. 누가 나의 인생관을 묻는다면 "어떠한 환경속에서도 내 인생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내가 무엇을 원할 때 얼마만큼 현명하게 그리고 힘껏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민생활의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후로는 한가지 더 배운 것이 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타고난 숙명)이 죽음의 길인 것 같다. 죽음을 통해서 배우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원하고 안 원하는 선택의 주어짐이 없이 삶은 계속되기 마련인 것 같다. 다시 직장에 나가 이곳 정부의 공무원 생활을 계속하면서 기회 있을 때 마다 통역도 하고 또 이곳 학교에 나가서 ESL도 가르치고 열심히 살다보니 어느덧 내 나이 60이 훨씬 넘었고 삼남매도 훌륭히 자라서 열심히들 살고 있다. 어느 곳이든 내가 사는 곳이 고향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내가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다 얻을수 있는 곳이 Canada인 것 같다. 어떠한 환경속 에서도 내 인생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과 같이 내 인생에 열심히 충실하다 보면 희노애락이 함께 모여진 아름다운 인생의 결실을 맺을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끝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5년 11/18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6 CNDream.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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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등록일: 2005-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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