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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내에서의 종교개혁(2) - 간략한 기독교 역사 40
새로운 수도회의 등장 1) 성녀 테레사 비록 종교개혁 발생 당시 대부분의 수도생활이 타락 상태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수도원과 수녀원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소명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이러한 수도원의 타락상을 깊이 슬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간구는 전통적인 수도회의 개혁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수도회를 만들어내었다. 새로운 수도회들 가운데 일부는 예전부터 전해진 전통적 수도원 규칙을 보다 엄격하게 지키고자 하였으며, 또 다른 일부는 16세기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자 하였다. 전통적 규칙을 엄격하게 따르는 형태는 "성녀 테레사(St. Teresa)"에 의해 설립된 '맨발의 갈멜 수도회(Discaled Carmelites)'이며,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형태는 "이그나티우스 로욜아(Ignatius Loyola)"의 지도 아래 있던 '예수회(Jesuits)'이다. 아빌라(Avila) 출신이기 때문에 '아빌리아의 테라사로 불리는 테레사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갈멜수녀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경건 서적들을 읽는 데 보내었다. 그런데 그녀는 종교재판소에서 발행한 금서(禁書) 목록을 보고 놀라움과 당황함을 금치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서적들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녀는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 '두려워 말라. 왜냐하면 내가 너에게 열려진 서적이 되어 줄 것이다'라는 환상을 보게 되었다. 이런 환상에 대하여 확신이 없던 그녀는 학식있는 수도사들의 도움을 통하여 자신이 경험하는 환상이 진짜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녀는 환상의 지시를 따라 수녀원을 떠나 보다 엄격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다른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환상의 요구에 따라 계속해서 스페인 전역에 걸쳐 이와 비슷한 수녀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그녀를 따르는 수녀들은 구두 대신에 샌들만을 신었기때문에 흔히 "맨발의 갈멜 수녀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때 테레사는 "십자가의 요한(St. John of the Cross)"과 함께 힘을 합쳐, 남성들까지도 포함하는 "맨발의 수도회"로 자라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테레사는 교회 역사상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들을 포함하는 수도회를 설립한 유일한 여성으로 기록된다. 테레사는 그녀가 설립한 수녀원들의 각종 행정 문제에 분주하게 시달리면서도 신비적 명상의 시간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명상은 자주 환상이나 황홀경을 가져다 주었다. 이 문제에 관해 그녀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은 신비주의적 경건생활에 관한 고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1970년 교황 바울 6세는 그녀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교회의 박사" 목록에 포함시켰다. 여성으로는 오직 성녀 캐더린이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오늘날도 현대교회에 경건생활에 있어서 그녀의 영향이 많이 미치고 있다. 2)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예수회의 창시자) 테레사의 개혁운동이 전통적 규율을 엄격하게 준수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보다 수년 전에 시작한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운동은 당시 교회가 당면한 외부적 문제들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군대 생활을 통해 명예를 얻고자 했던 이그나티우스는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평생 다리를 절게 됨으로써 이런 꿈이 깨지게 되었다. 그는 요양 중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참을 수 없는 절망을 달래기 위하여 경건 서적들을 탐독하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는 환상을 보게 되었다. 그 후에 그는 평생 은둔생활을 하려 하였지만, 루터가 경험했던 것처럼 은둔 생활 가운데 심각한 죄의식에 시달리면서 영혼의 위안을 얻지 못하였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얻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전해지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그를 죄에서 해방시켰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구원의 확신을 얻은 후에 루터와 로욜라는 정반대의 길로 갈라서게 된다. 왜냐하면 독일 수도사 루터는 결국 가톨릭 교회와 갈라서게 되는 길을 좇았던 반면에 로욜라는 정반대의 길을 갔기 때문이다. 그는 이때부터 자기 자신의 구원 만을 찾기 위한 개인적 수도생활을 뒤로하고 교회 및 그 사명을 위해 헌신하기로 작정하고 터어키 인들에게 선교하기를 희망하며 떠났다. 좀 더 효과적으로 사역하기 위해 신학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장년의 나이였지만 나이 어린 젊은이들과 함께 공부하였다. 얼마 안되어 그의 열정적 신앙에 끌린 일단의 추종자들이 주위에 모여 들었다. 결국 청빈, 순결, 그리고 교황에 대한 순명을 엄숙히 서약하는 새로운 수도회(예수회)를 만들었다. 예수회의 원래 목적은 성지의 터어키 인들 사이에서 사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도회는 프로테스탄트의 위협에 대항하는 가톨릭측의 가장 중요한 공격 무기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회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의 원래의 선교에 대한 임무를 잊지 않았으며, 곧 수백 명의 회원들이 극동과 신세계에서 일하게 되었다. 예수회는 오늘날까지도 가장 활발하게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트렌트 종교회의 루터를 비롯한 여러 종교개혁가들이 기독교권 전체를 망라하는 종교회의를 요구하였지만 교황들은 종교회의 소집에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일찍이 교황보다 종교회의가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던 종교회의 운동의 부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1545년 12월에 '트렌트'에서 종교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이 종교회의는 단지 프로테스탄트주의를 정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학의 전반적인 문제와 교회 개혁을 위한 주제를 다루게 되었다. 1545년에 소집되어 1563년에 종료된 "트렌트 종교회의"는 많은 주제를 다루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주교들에게 자기들의 교구에 거주할 것을 명령하였고, 복수성직제를 정죄하였으며, 성직자들의 의무와 책임을 열거하고 정의하였고, 성직자들을 배출하기 위한 신학원의 설립을 명령하였다. 프로테스탄트주의에 대한 대책으로, 성경의 라틴어 번역판인 '벌게이트'판이 가장 권위가 있다고 선언하였고, 전통은 성경에 상응하는 권위를 지닌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례는 7가지이며, 2종 성찬, 즉 평신도들이 빵과 포도주를 모둔 받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하였다. '칭의'는 은혜와 신자 사이의 협력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선행'에 기초한다고 하였다. 트렌트 종교회의는 현대 가톨릭 교회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이 현대 가톨릭 교회는 루터가 저항하였던 중세 교회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는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한 반동(反動)의 흔적을 지니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후 4세기 동안 이러한 반동의 결과 로마교회는 트렌트 종교회의가 부인하였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많은 요소들이 기독교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조차를 부인하려 들었다. 그후 오랜 세월이 지나 20세기에 들어서야 가톨릭에는 마침내 프로테스탄트주의에 대한 반동으로부터 벗어난 별개의 개혁 방안을 수립할 수 있게 된다. 글: 캘거리 성결교회 한호 목사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5년 11/18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6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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