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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기독교와 카톨릭의 전쟁) _ 간략한 기독교 역사 42
1. 30년 전쟁의 배경 16세기 독일 안에서의 종교전쟁을 종결시켰던 아우그스부르크 평화 조약(Peace of Augsburg)은 오래 지속 될 수 없었다. 이 조약에 따르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를 막론하고 통치자들과 영주들은 자기 영토 내의 종교를 자유스럽게 결정할 수 있었는데, 이에 동의하지 않는 주민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종교를 찾아 이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는 아우그스부르크의 신앙 고백을 추종하는 프로테스탄트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칼빈주의자들을 비롯한 다른 신자들은 계속하여 이단으로 간주되었으며, 박해를 면할 수 없었다. 종교 선택의 자유가 영주들에게만 주어졌으므로 영주 아래에 있는 일반 주민들 가운데에는 주어진 종교에 만족하지 못한 이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아우그스부르크 평화 조약에는 "종교적 보류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일정 지역의 주교들이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다 할지라도 해당 지역은 계속 가톨릭으로 남아 있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들을 감안해 볼 때, 아우스부르크에서 성취된 평화는 양측에서 서로 무력으로 상대방을 이길 자신이 없을 때에만 유지될 수 있는 잠정적인 휴전에 불과했다. 2. 30년 전쟁의 시작 1576년에 황제가 된 루돌프 2세는 가톨릭 소속인 제수잇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신도들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나약한 성품 때문에 친가톨릭 정책을 펼치지 못하여서 30여년 동안은 평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1606년 황제 직할 도시인 '도나우베르트'(Donauworth)에서 폭동이 발생하였다. 이미 프로테스탄트를 선택한 이곳에 수도원 하나가 가톨릭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곳의 수도사들은 황제의 친가톨릭적 경향을 믿고 수도원 밖으로 행진을 시도하였으나 시민들에 의해 봉쇄당했다. 이런 사건은 당시에 매우 흔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이 있은지 일년 후에 인근에 있는, 강력한 가톨릭 도시인 바바리아의 맥시밀리안 공작(Duke Maximilian of Bavarian)이 프로테스탄트 주의를 없애기 위해서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1608년에 프로테스탄트들은 함께 모여 "복음주의 연맹"(Evangelical Union)을 결성했고, 일년 후에 가톨릭측도 "가톨릭 동맹'을 결성하였다. 하지만 복음주의 연맹은 모든 프로테스탄트들을 포함하지 못했기 때문에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가톨릭 측의 승리가 예견되었다. 이러한 때, 루돌프 황제가 실각하고 동생인 '마티아스'(Mathias)가 황제가 되었지만 뛰어난 인물이 되지 못했다. 그가 프로테스탄트 지역인 보헤미아의 국왕에 임명한 사촌 페르디난드는 열렬한 가톨릭 신도로서 곧 주민들의 불신을 자아냈다. 프라하의 왕실 위원회가 국왕의 정책에 대항한 주민들의 반대에 귀를 기울이기를 거부하자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들은 반란을 일으켜 왕의 고문 두 명을 창밖으로 집어 던졌다. 만약 이들이 쓰레기 더미 위에 떨어지지 않았으면 중상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흔히 "프라하 폭동"으로 알려진 이 사건이야말로, 유럽의 모든 나라와 지역이 연관됨으로 말미암아 20세기 이전까지 가장 처참하고 처절한 유럽 전쟁이었던 30년 전쟁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30년 전쟁은 원래 종교적 동기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그 원인은 잊혀지고 단지 각 나라와 영주들의 권력 투쟁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전쟁으로 인해 보헤미아의 인구가 전쟁 시작 전과 비교 했을 때, 1/5로 감소하였다. 결국 가장 피에 굶주렸던 자들까지도 전쟁과 파괴에 지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기간의 복잡한 협상 과정을 거쳐 1648년에 드디어 "웨스트팔리아 평화 조약"(Peace of Westphalia)이 조인되고 30년 전쟁의 참화가 끝을 맺게 되었다. 3. 30년 전쟁의 결과 이 전쟁을 통해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프랑스와 스웨덴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국경을 라인강까지 넓히게 되었고 스웨덴은 발틱해와 북해의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종교적 문제에 있어서는 영주들 뿐만 아니라 일반 주민들까지도 가톨릭, 루터란, 혹은 개혁파들 가운데 한 가지 신앙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건물들과 각종 종교 기관들은 1624년 당시의 상태로 복구되었다. 또한 합스부르그가의 세습 영지만 제외하고는 전쟁 중 상전들에게 저항했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전반적인 사면이 행해졌다. 이러한 것들이 지루하고 잔인했던 30년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비록 평화 조약 문서 가운데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보다 중요한 결과들이 잉태되고 있었다. 웨스트팔리아 조약에 나타난 종교 자유의 원칙들은 기독교의 박애 정신을 보다 깊이 이해한 결과라기보다는 "종교 문제에 관한 무관심"의 증가의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인간들은 이 전쟁을 통하여 종교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처참한 고통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결국 무력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많은 이들은 세속 영주들이 종교적 신앙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들의 이익, 혹은 백성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책을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현대 세속 국가가 발전되지 시작했다. 이와 함께 이전 세대들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신앙의 문제들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과연 어떠한 근거로 신학자들은 자기들만이 옳고 다른 이들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했단 말인가? 30년 전쟁과 같은 참혹상을 발생하게 했던 교리들이 과연 옳을 수 있는가? 가톨릭이거나 프로테스탄트들을 막론하고 단순히 전통 교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보다는, 보다 너그럽고 심오하며 보다 기독교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길은 없는가? 하는 질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30년 전쟁과 다른 유사한 사건들의 결과로 나타난 이런 의문들이 17세기, 18세기에까지 연결되고 있다. 글 : 캘거리 성결교회 한호 목사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5년 12/9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6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6-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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