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안내   종이신문보기   업소록   로그인 | 회원가입 | 아이디/비밀번호찾기
무엇이 진리인가? _ 원종호 (캘거리 교민, 회계사)
1. 끝없는 추구 약 2000년전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던 빌라도 로마총독이 예수님을 심문하는 중에 물은 질문이 이것이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요한 18:38) 이 질문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수 많은 학자들과 지식인들의 끝없는 질문이었으나 누구도 쉽게 답을 못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많은 대학의 Mission Statement에 이 진리 탐구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 것을 보면 그에 대한 추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2. 나와 무슨 상관 그런데 매일 매일을 너무 바쁘게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런 종류의 질문은 너무 거창하기도 하고 또 학창 시절에 술 안주로나 삼던 비현실적인 주제인 것 처럼 보여진다. 그러면 이런 질문은 우리 생활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고매한 학자들만의 주제이며 바쁜 우리에게는 너무 사치스러운 의문인가. 그런데 만약 우리가 삶을 거의 마감할 때가 되었을때 우리에게 혹시 이런 생각이 들면 어떨까. 지나온 삶을 돌아다 보면서 ‘어, 이 길이 아니었는네!’ 하고 그 때까지 살아 온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놀라거나 후회하는 일은 없을까. 3. 좋은 삶, 풍성한 삶, 후회 없는 삶 예수님의 산상설교 처음 부분인 팔복 중의 하나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마태 5:6)라고 하였다. 부나 명예나 권력을 추구하는 자가 아닌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좋은 삶을 산다는 것이다. 또 시편 제일 앞 부분에서도 “복있는 자는 … 여호아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시편 1:1-2)라고 하였다. 진리를 아는 것이 좋은 삶, 풍성한 삶 그리고 후회 없는 삶의 중요한 요소이기에 이렇게 성경의 중요한 부분 중 가장 앞 부분에 나오는 것은 아닐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고린도후서 6:7). 진리 안에 있으면 하나님이 주는 능력을 얻는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진다. 결국 진리에 가까이 서면 우리는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힘과 능력을 얻어 세상을 더 잘 살수 있기에 이런 질문이 결코 비현실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4. 사실과 진리 우리가 종종 혼동할 때가 있다. 사실을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과 진리는 너무 다르다. 사실이란 거짓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은 항상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즉 지금 사실인 것이 몇 달후나 몇 년후면 더 이상 사실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지금 나뭇잎이 푸르지만 조금 있어 가을이 오면 더 이상 그 잎은 푸르지 않다. 지금 푸르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풍이 들었을 때도 푸르다고 하면 그 때는 거짓이 되는 것이다. 또 공간의 한계도 있다. 여기 캘거리에서는 겨울이 춥다고 생각되지만 열대 지방에 가면 그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닌 것이다. 이렇듯 사실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는 언제이든지 또 어느 곳에서든지 진리이다. 만약에 하나의 진리가 여기에서는 맞고 저기서는 맞지 않다면, 또 그 때는 진리였는데 지금은 진리가 아니라면 자기 모순에 빠져 더 이상 진리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실은 보이는 현상일 뿐이지만 진리는 그 현상의 뒤에서그 현상을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힘이라는 점에서 또 서로 다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지금 나의 손에 있는 물고기는 하나의 사실이지만, 그것을 있게 한 근본원인, 즉 물고기를 잡는 방법은 그 뒤에 숨어 있는 원리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복잡한 정의가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삶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는데, 그 제한된 시간을 어디에 투자를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얼마 있으면 변해 버릴 눈에 보이는 사실이나 현상에 투자를 할 것인지, 아니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어떤 것에 투자를 해야 하는지의 문제이다. 얼마 후 사라져 버릴 것에 투자를 한다면, 거기에 투입된 노력이나 시간도 얼마 후에는 헛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마치 얼마 후 파도에 밀려 없어질 모래성을 쌓는 것처럼. 그래서 오래 가도 변치 않는 것에 우리의 소중한 시간이나 노력을 바치는 것이 지혜로운 자의 모습이다. 성경에서 지혜로운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고 어리석은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마태 7:24-26)고 하였다. 5. 쉽고도 가까운 것 진리라는 것이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요즘 유행하는 동물 복제처럼 그렇게 어렵거나 복잡한 것인가. 어떤 사람은 진리를 찾아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책만 읽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많은 곳을 돌아다니거나 고행을 하기도 한다. 또 다른 이는 수도원 같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진리가 그렇게 멀리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우리에게서 멀리 있고 어려운 것이라면 우리가 구태여 그것을 그렇게 애써 찾아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 왜냐면 어차피 어려운 것이라면 노력한다 하더라도 발견할 가능성이 별로 없을 것이며, 또 멀리에 있는 것이라면 내 삶과 그렇게 관련이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리는 우리 가까이에 있으며 그리고 그것을 찾는 순수한 눈이 있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단지 추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실재 존재했었던 한 사람을 통해 보다 쉽고 또 정확하게 알 수 있다. 6. 생명으로 가는 길 인간에게 가장 궁극적인 소망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생명이다. 그것도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우리의 모든 욕구나 동기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랜 옜날 절대 권력을 휘들렀던 중국 진시황의 소원이도 했고, 또 내가 어렸을 때 즐겨 보았던 TV만화 시리즈인 “은하철도 999” 의 주제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의 육신은 어떻게 하든 썩어 없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 육신으로는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없어질 내 육신이 아닌, 없어지지 않는 어떤 것에 우리의 에너지를 쏟는다면 우리가 그 속에서 존재할 수 있지는 않을까. 마치 에펠이 에펠탑을 세우고 그는 죽어 없어졌지만, 그의 혼과 이름은 앞으로 몇 백년이나 아니면 그 이후 그 탑이 없어질 때까지 남는 것처럼. 그러면 우리의 무엇이 오래도록 남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계속되는 생명에 이르기 위해 어디에 무엇을 남겨야 한다는 것인가. 그리고 혹시 진리라는 것이 그것을 여는 열쇠는 되지 않을까. 7. 이해, 용서 그리고 사랑 우리에게 가장 오래 기억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나에게 맛 있는 저녁을 사 준 사람인가. 아니면 나를 많이 칭찬하거나, 나에게 굽실거리던 사람들인가. 내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면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다. 나를 이해해준 나의 친구들이나 동료들. 나의 잘못을 용서해 주거나 감싸준 선생님이나 상사. 그리고 나를 사랑해준 나의 가족들. 누구나 자녀들에게서 감사의 편지나 카드를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 무엇이라고 써졌는지 기억해 볼 일이다. 값 비싼 나이키 신발을 사 주어서 고맙다고 했는지 아니면 자기를 이해해 주어서 고맙다고 했는지… 이런 개인적인 경험이 맞다면, 내가 다른 사람들을 오래 기억하듯 다른 사람도 내가 그들을 이해하고, 감싸주고, 사랑해 줄 때 그들에게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해와 용서와 사랑은 우리에게 보편적인 욕구이다. 왜냐면 누구든지 다른 사람과 조금은 다르기 때문에 이해받고 싶은 욕구가 있고, 누구나 조금씩은 잘못이 있기에 용서받고 싶으며, 그리고 누구나 누군가로부터 도움이 필요하니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욕구는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항상 채워지기를 원하는 굶주림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그것이 채워져 있으면 다른 것이 조금 없어도 행복해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없으면 다른 것이 아무리 많아도 삶은 불만스러운 상태에서 벗어 나기 힘들다. 따라서 요즈음 범죄나 자살 등 사회의 여러가지의 폭력적인 모습은 육체의 배고픔이 아니라, 영적인 배고픔, 즉 사회적 소외감 때문에 대부분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해, 용서 그리고 사랑은 앞에서 언급한 진리의 세 가지 요소를 충족시킨다. 우리 기억에 오래 남으니 시간의 테스트를 합격한 것이며, 누구에게나 보편적이니 공간의 한계도 극복한 것이며, 또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니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해, 용서 그리고 사랑이 바로 진리의 좀 더 구체적인 모양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맞다면 진리란 그렇게 심오하거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니며 또 그렇게 어려운 무엇도 아니다. 단지 우리 가까이에 있는 가족이나 이웃부터 시작하여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가 아닌가. (다음호에 마지막 2편이 이어집니다._ 편집자 주)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6년 9/81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6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6-09-26
나도 한마디
 
최근 인기기사
  캐나다 소득세법 개정… 고소득자..
  로또 사기로 6명 기소 - 앨버.. +4
  웨스트젯 캘거리 직항 대한항공서..
  성매매 혐의로 억울한 옥살이 한..
  캘거리 의사, 허위 청구서로 2.. +1
  버스타고 밴프 가자 - 레이크 .. +4
  주정부, 전기요금 개편안 발표..
  미 달러 강세로 원화 환율 7%..
  캘거리 고급주택 진입 가격 10..
  해외근로자, 내년부터 고용주 바..
댓글 달린 뉴스
  버스타고 밴프 가자 - 레이크 .. +4
  오일러스 플레이오프 진출에 비즈.. +1
  로또 사기로 6명 기소 - 앨버.. +4
  캘거리 의사, 허위 청구서로 2.. +1
  돈에 관한 원칙들: 보험 _ 박.. +1
  2026년 캐나다 집값 사상 최.. +1
회사소개 | 광고 문의 | 독자투고/제보 | 서비스약관 | 고객센터 | 공지사항 | 연락처 | 회원탈퇴
ⓒ 2015 CNDrea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