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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세상을 살며...오충근 에드몬톤 통신원
가꾸지 않아 엉망이 된 화단에는 화초보다 잡초가 더 많이 자라나고 그 곁에 영양실조 걸린 어린 계집애처람 앙상한 코스모스가 자라더니 어느새 꽃이 피었다. “죽고 죽이는 전쟁 통에서도 꽃은 피는구나” 창 밖으로 하늘거리는 연분홍색 코스모스를 바라보다 게엄령 때문에 술 타령하지 않고 일찍 들어오는 남편과 6살, 3살짜리 애들 저녁준비를 하던 은신은 ‘형님 오세요.’ 라는 남편의 목소리에 부엌을 나와보니 큰 시아주버니가 신발을 벗고 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남편은 김포에서 인천까지 교통도 불편한데 온 큰형님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물었다. ‘군인들이 와서 희숙이를 데려갔어.’ 침울한 목소리로 말하곤 천정을 바라보며 애꿎은 담배만 태우는 큰 시아주버니를 바라보며 은신은 몇 달 전 일을 생각했다. 6월25일, 일요일 아침 삼팔선에서 난리가 또 났다는 소식을 듣고 가끔 있던 일이라 별 게 아니겠지 했는데 사태가 심각한지 오후에는 휴가중인 군인들 귀대하라는 방송이 나오고 신작로까지 나갔다 온 큰 녀석은 거리에 트럭을 세워놓고 헌병들이 군인들을 태워 간다 고 신이 나서 말했다. 다음날 회사에서 돌아온 남편은 은신에게 우선 애들 하고 장모 모시고 김포 본가로 가 있으라 했다. 남편도 돌아가는 상황을 봐서 김포로 오겠다 하면서. 그녀는 남편 말대로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어머니 모시고 김포 남편 본가로 가다 병사들을 인솔해 오던 인민군 군관을 만났다. “어데 가십네까?’ 단정한 군복 차림에 허리에 권총을 찬 젊은 군관은 평안도 사투리로 공손하게 물었다. 난리가 나서 시골로 피난 간다는 말에 군관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해방 시키려 온 거니 피란 안가도 된다는 말과 함께. 단련된 병사들 사이로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가진 소년 병이 보였다. 키만큼 큰 장총을 둘러멘 소년 병의 천진한 눈망울이 전쟁하고는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겨우 고등학교 다닐 나이인데 무엇이 저 소년을 전쟁으로 내몰았을까? 군관은 병사들을 인솔해 행군을 계속했다. 남편의 본가에는 시부모들 과 큰 동서 내외, 시댁 조카들이 있었고 같은 마을에 출가한 손위 시누이 두 명이 살고 있었다. 그 중 희숙은 큰 시아주버니의 큰딸인데 여학교 졸업하고 집에 있다고 들었는데 저녁에 보니 붉은 완장을 차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물어보니 마을 여맹위원장 일을 한다고 했다. 형제 중 막내인 남편과 큰형님과는 나이 차이가 많아 거의 아버지 같은 큰형님이니 희숙과 은신도 나이 10년 좀 넘게 차이 나는 조카딸 과 숙모 사이다. 왜 그런 일을 하냐는 말에 희숙은 그냥 김포군당 위원회에서 시켜서 그냥 하는 것이라 했다. 사회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혁명의 혁 자도 모르는 겨우 여학교 졸업한 시골처녀가 여맹위원장 이라니 은신은 기분이 씁쓸했다. 한창 나이이고 시골에서나마 여학교를 다녔으니 사람 귀한 시골에서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그렇겠거니 생각은 들지만 빨갱이 때려 잡는다고 온갖 행패를 다 부리며 죄 없는 사람까지 때려잡는 서북청년단 생각에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의 행패를 가까이서 보고 들은 게 어디 한 두 번이랴. 이런 험한 세상에서는 배운 것도 죄가 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 희숙에게 물었다. ‘그런 일 안 할 수 없어?’ ‘시키니 하는 거에요.’ ‘그만 두는 게 좋을 텐데. 그만 둘 수 있으면 그만 둬.’ ‘안 하려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인천상륙작전, 9.28 서울수복, 국군의 북진. 통행이 허락 된다는 소식에 은신은 친정어머니 와 애들을 데리고 서둘러 인천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급박한 피난살이 라지만 자존심 강한 세도가문 출신의 친정어머니까지 모시고 시댁에 있으며 층층시하인 시댁식구들 눈치 보랴, 친정어머니 눈치 보랴 은신으로선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인천 집에 돌아 왔지만 폭격으로 폐허가 된 인천은 낯선 거리 같았고 여전히 어수선한 전쟁분위기였다. 다행이 그 집과 이웃 집들은 폭격을 면한 채 온전한 모습이라 안심이 되었다. 그런 참에 시아주버니가 온 것이었다. ‘희숙이 문제를 어떻게 하지?’ 잠자리에서 남편은 은신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알았어요.’ 은신은 저녁 내내 생각했던 말을 한마디로 말했다. 전시부역은 총살에 해당되는 이적행위인데 바로 희숙에게 해당되는 것 이었고 집안이 빨갱이로 몰려 풍비박산 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빨갱이로 몰린 다는 건 당사자뿐 아니라 온 집안에 내리는 천형(天刑)이상의 형벌이었다. 다음날 은신은 친정아버지 만나러 갈 차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친정 집으로 갈까 생각도 했는데 사무실로 가는 게 낫다 생각하고 세종로로 갔다. 친정에 가봐야 보기도 싫은 작은댁 하고 얼굴 맞대야 할 텐데 라는 생각에. 일제 때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해 군수부터 시작해 도청 고위직에 있다 해방을 맞은 친정아버지, 그 후 해방된 조국에서도 부귀와 권세를 누린 친정아버지, 그런 친정 아버지가 못마땅하고 창피해 쉬쉬하며 살아가는 은신이었는데 결정적으로 부녀 사이를 갈라놓는 일이 생겼다. 친정아버지에게 소실이 생겼다. ‘조국을 반역한 분이 어머니 배신하는 거야 쉽겠지요.’ ‘너 그게 애비한테 할말이냐?’ 분노를 참는 떨리는 목소리였다. ‘내 말이 틀렸어요?’ ‘내가 없었으면 네 동생은 학병 끌려갔고 너는 정신대 끌려가 살았을지 죽었을지도 몰라. 이 철없는 것아’ 아버지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개인적으로는 고맙게 생각해요. 그러나 조국 반역해 친일 한 거 사실이고 어머니 배반하고 다른 여자 하고 살림 차린 거 사실이잖아요.’ ‘이런 못된 것. 다시는 애비 앞에 나타날 생각 마라.’ ‘안 와요.’ 미장가인 두 살 터울 남동생은 남겨두고 그날로 친정어머니 모시고 인천으로 내려온 은신은 그 후 일년에 두 번, 구정 과 추석에 아이들 데리고 친정에 가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에게 절하고 나올 동안 처녀적에 있던 방에 들어가 혼자 있다 아이들이 안방에서 나오면 그 길로 되짚어 인천으로 돌아오곤 했다. ‘따님이 찾아왔는데요.’ 비서의 말에 흥재씨는 아주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을 했다. 제 발로 여기 올 아이가 아닌데.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딸의 성격을 아는 흥재씨는 무슨 일이 났음을 직감했다. ‘아버지 나 왔어요.’ 들어오라는 연통도 있기 전에 들어오는 큰딸, 오랜만에 보는 큰딸이다. 부녀간에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은신은 시댁 조카 희숙 이야기를 했다. 앞길이 창창한 처녀아이 생명에 관계되는 일이고 한집안이 망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라는 말과 함께. 딸이 돌아간 후 흥재씨는 비서를 불렀다. ‘경기지구 계엄사령부에 전화해서 사령관 대라 해라.’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주눅이 들은 희숙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공포에 질려 헌병대 영창에 갇혀 있었다. 헌병이 그녀 이름을 불렀다. 겁에 질린 채 후들거리는 마음을 겨우 진정하며 세상물정 모르는 시골처녀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드디어 취조 받을 차례가 온 것이다. ‘이름이 뭐야?’ 취조관은 이외로 부드럽게 물었다. 몇 가지 물어본 취조관은 잘못한 걸 시인하면 용서해주겠다며 종이를 내밀었다. 희숙은 뭐라 써야 할지 몰랐다. ‘아저씨가 불러주어요. 그냥 받아 쓸게요.’ 희숙은 반성문을 쓰고 풀려 나왔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겠다는 서약과 함께. ‘사회주의는 뭐고 자본주의는 뭐란 말인가? 권력 좋아하는 사람들이 권력 잡기 위해 만든 허깨비 아닌가? 잘라빠진 이념 싸움에 죽어나는 건 죄 없는 국민들이고. 참 험악한 세상이다.’ 희숙이 풀려 났다는 남편의 말에 뜰에 핀 코스모스에 앉아 있는 잠자리를 보며 은신은 그런 생각을 하며 문득 가을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잠자리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6년 10/13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6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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