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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아들에게 내가 좌파 빨갱이라는 걸 들켜선 안돼.

작성자 떠돌이 게시물번호 18957 작성일 2025-05-29 16:28 조회수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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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쒸~ 내가 시급이 얼마짜린데 이런 일을 해야 돼요?’

같이 살고 있는 아들 녀석에게 아내가 진공청소기좀 밀랬더니, 툴툴거리면서 청소를 하며 그놈이 했다는 말이다.

맹랑한 녀석 같으니라구, 곧 ChatGPT 때문에 실업자 신세가 될지도 모르는 녀석이 말이야! 집에 가서 혼쭐을 내줘야겠다, 라고 생각했는데 아내가 전해 준 다음 말을 듣고서 혼내는걸 보류했다.

‘그래서 자기 청소하기 싫다고 로봇 청소기를 주문했다네!’

 

2

 

위는 1년여 전에 내가 아들에 대해서 쓴 글 중 일부를 자기 표절한 것이다.

 

트립에서 돌아온 후 로봇 청소기를 보니 물걸레 청소까지 하는 아주 신박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아들은 과연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시급이 셌다. 난 녀석이 돈을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버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예상 밖의 전개였다.

 

3

 

나는, 대부분의 다른 것에도 마찬가지지만, 아들에게 큰 기대가 없었다. 독서지도 외에는 방임하듯이 키웠는데 결국 실패했다. 책 한 권 읽으면 용돈을 주겠다고 그렇게 꼬셔댔지만 녀석은 지금도 책을 멀리한다. 그리고 당연히, 고등학교 학업 성적도 신통치 않았다. 그저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이루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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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 코로나가 한창이었다. 아들이 있는 곳에서 직장 찾기가 힘들어서 캘거리로 불러 같이 살기 시작했다. 한참을 고군분투한 끝에 코로나가 잠잠해질 무렵 겨우 직장을 구했다.

 

녀석은 첫 직장에 불만이 대단했다. 너무 급여가 인색하고 배울게 없다는거다. 난 속으로 ‘건방진 놈’ 이라 생각하며 그저 캐나다 1인당 gdp 보다는 많이 버는 것이니 그 정도에서 만족하라고 말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함과 동시에 사회에 대한 불만도 드러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이 세금을 떼가냐는 거다. 난 “네가 결혼하면 세금도 낮아지고 육아비도 지원받을 수 있으니, 세금이 아깝다면 빨리 짝을 찾아 결혼해라” 라고 대꾸해줬다.

 

5

 

오랜만에 아들과 살아보니 녀석이 참 재밌다는 사실을 알았다. 항상 헤~ 하며 웃고 다닌다. 같이 쇼핑이나 등산 가자고 하면 “아, 귀찮아~ 귀찮아~” 하며 도망 다닌다. 일주일에 이틀은 재택근무를 하고 겨우 3일을 출근하면서 아침에 나갈 때마다 “으~ 귀찮아~ 가기 싫다~” 하며 길을 나선다. 아내와 내가 tv를 볼라 치면 “똥 싸야지~ 히히~” 하며 화장실로 들어간다. 아마도 어릴 때 심한 변비 때문에 우리를 걱정시키던 것과, 굵은 똥을 싸대서 몇 번 변기가 막혔던 걸 아직도 기억하는가 보다.

 

그래서 녀석과 얘기하다 보면 아내도 나도 같이 헤실헤실 웃게 된다. 아들은 웃긴 녀석이다. 뭐, 큰 기대는 안 하지만 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6

 

근데 갑자기 녀석이 나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버는 능력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너희 회사 원래 그렇게 모두에게 급여를 많이 주니?” 물었더니,

 

“아닐걸. 먼저 입사했지만 나보다 랭크가 낮은 사람들이 있어.”

 

오, 처음으로 아들 녀석을 다시 보게 됐다. 집에선 “귀찮아, 귀찮아!” 를 입에 달고 다니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녀석이 직장에선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니 별일도 다있다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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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들은 현상에 만족하지 않았다. 재택 근무할 때마다 짬을 내거나 휴가를 받아 틈틈이 집에서 원격으로 면접을 봤다. 상대는 빅테크계의 기라성 같은 회사들이었다.

 

나는 녀석이 면접에 떨어질 때마다 안타까웠다. 너무 힘이 들어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그래서 이런 말까지 했다.

 

“그런 회사엔 인도나 중국에서 온 전 세계 기라성 같은 천재들이 모두 모여 있잖아. 네가 거기 가서 그들과 경쟁할 수 있겠니? 좀 힘들지 않을까?”

 

내가 한 말을 녀석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모르겠는데, 녀석의 도전은 계속됐다.

 

8

 

한 달 전에 캐나다 총선이 있었다. 캐나다 시민권자인 아들에게 선거 안내 메일이 왔다. 선거 전날 아들이 불쑥 물었다.

 

“저 누구 뽑아요?”

 

“왜, 투표하게?”

 

“할까 말까 고민 중. 투표하면 회사에 오후에 와도 된대.”

 

오오, 드디어 아들과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게 생겼다. 조심해야 한다. 절대 아들에게 내가 좌파 빨갱이라는 걸 들켜선 안돼.

 

9

 

일단 아들과 잠깐 얘기를 해 보니 녀석은 정치에 대해서 1도 몰랐다. 그도 그럴게 책과 담을 쌓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투표할 때 약간의 가이드라인은 줘야 할 것 같아서 몇 가지 얘기를 해 줬다. 단, 내가 빨갱이인 걸 들키지 않으면서 아들이 가져 줬으면 하는 정치적 스탠스를 유도한거다.

 

“일단 선거는 큰 놈 둘이 싸우는 거야. 보통 한쪽은 진보고 또 한쪽은 보수지.”

 

“진보는 큰 정부를 지향해. 보수는 반대로 작은 정부를 원하지. 아마도 너에게 크게 와닿는 건 세금일 거야. 큰 정부는 더 많은 세금을 뜻하거든.”

 

“큰 정부는 이것저것 일을 많이 하고 싶어 해. 가난한 사람이나 장애인들을 도와야 하지. 작은 정부는 돈이 없기 때문에 이런 복지정책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어.”

 

“그래서 보수는 자유를 추종해. 여기서 자유라 함은 신체의 자유가 아니라 돈의 자유야. ‘내가 능력이 좋아서 돈을 많이 벌어 나와 내 후손이 남보다 잘 산다는데 뭔 간섭이냐.’ 라는 것과 유사해.”

 

“진보는 공평 또는 평등을 지향하지. 사실 어떤 사람이 부자거나 가난한 것은 개인 능력보다는 그 환경이 더 많이 작용해. 그래서 가난한 사람도 평범한 사람과 같은 기회를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 혜택 받은 부자들에게 돈을 걷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려는 복지정책을 펴지.”

 

“그니깐 보수는 자기중심적이고 진보는 이타적이야. 그래서 보수는 보통 자기 이외의 일에 대해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 때문에 동성애 문제나 난민에 대해서 백안시 하지. 진보는 동성애자에 관대하고 이주노동자에게도 내국인과 같은 기회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말이지.”

 

“엄마 아빠는 워킹 클래스야. 비록 너가 세금을 많이 내서 불만이겠지만 우리 계급 입장에서는 사실 진보에 투표하는게 맞지.”

 

“물론 넌 지금 건강하고 돈 많이 버는 건 맞아. 하지만 언제나 불운은 가까이 있단다. 엄마 아빠가 죽은 후 갑자기 네가 사고를 당해 불구가 되거나 어떤 이유로 네가 가난한 독거노인이 된다면 결국 너를 돕는 정부는 진보일거야.”

 

투표일이 다가왔다. 저녁에 귀가한 아들에게 어디 쪽에 투표했는지 물어봤다.

 

“으~ 귀찮아서 안 했어.”

 

네가 그럼 그렇지 뭐.

 

10

 

약 3주간 아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사가 있는 회사와 인텐시브하게 면접을 진행했다. 회사는 3단계에 걸친 기술 테스트를 했으며 아들은 그 모두를 통과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드디어 잡 오퍼가 날아왔다. 대폭 오른 연봉, 리로케이션 지원금, 그리고 스톡옵션이 따라붙었다.

 

녀석은 더 이상 우리 부부처럼 워킹 클래스가 아닌 것 같다. 스스로도 자신은 몇 년 후면 밀리어네어가 되어 있을 것 같다고 얘기한다. 헤실헤실 웃고 있는 저 녀석이 그런 능력자라니 예상 밖이었다.

 

나는 현재 아들 녀석의 얼굴을 볼 때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될지 모르겠다. ‘네가 전 세계에서 몰려든 천재들과 경쟁을 할 수 있겠냐?’ 라는 식의 말을 아들에게 했다는 사실이 창피스럽다.

 

아들은 앞으로 더 많은 세금을 낼 것이다. 그 때문에 아들이 보수주의자가 된다 하더라도 불만이 없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아들이 우리를 멀리 떠나간다는 것이다. 나까지 일을 나가면 이제 아내 혼자 쓸쓸히 집을 지켜야 한다. 조기 은퇴를 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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