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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전투.. 유인형 컬럼
양귀비 꽃 유래
현충일이면 ‘잊지말자(Lest We Forget)’이라는 양귀비 꽃을 단다.
파피(Poppy)가 현충일에 등장하게 된 유래는 제1차세계대전 때 부터다.
파피는 벨기에와 프랑스등지에서 자생했다. 석회석이 많아 양귀비가 한참인 필런더스 벌판에서 무시무시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치열한 전투에서 붉은피를 뿌리고 산화한 젊은이들은 마치 한떨기 피빛의 양귀비처럼 보였다.
전쟁에는 반드시 미망인, 고아, 상이용사가 뒤따른다. 어느 한 미망인이 양귀비 현충일 꽃을 만들어서 전쟁고아들을 도운게 동기가 된다.
캐나다는 1918년 제1차대전이 끝난 11월11일 오전 11시를 현충일로 제정했다. 한국동난으로 캐나다군이 참전했었다. 부상 1255명, 전사 516명의 젊은이들이 한국 땅위에 빨간 피를 뿌렸다.
수많은 작전중에서 가장 치열한 백병진의 ‘가평전투’만 재조명 해 본다. 여러 참전 전사를 참고로 인용했다.

상황전개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로 주방어망이 뚫리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캐나다군 제25여단장 버커준장은 PPCLI(Princess Patricias Canadian Light Infantry) 제2대대에 현지 사수 명령을 하명한다.
대대장은 즉각 가평천 서쪽의 677고지에 A,C,D 중대순으로 급편방어를 편다. D중대앞 돌출부에 B중대를 투입하자, 적 정찰분대가 달려들었다.
이곳은 반월형의 가평천과 개활지가 제압되는 곳이다.
내촌 2km의 677고지와 가평 6km거리의 예상 적 침투로이다. 두말할 것 없는 요충지의 길 몫이다. 밤 10시가 되자 증강된 정예 중공군이 공격해 왔다.
B중대 전면으로 인해전술이다. 방망이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로 달려들었다. 엄청난 포탄과 화력으로 후퇴시켰지만 집요하게 재공격 해 들어왔다. 6소대는 콩가루가 되었다. 소대장은 재빨리 재편성을 끝내자 총검술로 잃었던 진지를 되찾았다.
중공군은 박격포진지를 빼앗은 후, 영국군 미들섹스 대대를 휩쓸어 버림으로 전과 확대의 기도비익이 나타났다. 이곳이 뚫리면 6.25때처럼 서울진격의 기계화부대 침투로가 된다.
짐스톤 중령은 각 중대에 철통사수를 엄명하면서 전 여단포의 지원을 요청한다. 바로 이때에 한국군 제6사단이 뚫리면서 사창리-가평선이 무너지고 만다. 적들은 집중강타의 화력에 밀려 다시 D중대로 공격방향을 바꿨다.
전면포위를 위해 최좌단의 제10, 제12소대를 차례로 유린하고 중대본부로 착검, 돌격해 왔다. 전멸위기의 인해전술에 말려들었다. 북새통 속에 중대장 밀러대위는 V-T탄을 때리라고 최후방어 요청을 했다.
이미 진지위엔 새까맣게 적으로 뒤덮혔다.
V-T탄은 사방, 팔방으로 파편이 나는 주비포탄이었다. 적과 함께 죽겠다는 진지사수결단이다. 적들의 시체로 뒤덮혀 버렸다.
참호에 대피했던 대원들로 재편성하여 다시 인해전술로 달려드는 공격로를 틀어막았다.
벌써 밤낮없는 3일째이다. 탄약과 비상식량, 물이 떨어져 공수보급을 간청한다.
마치 날라리와 대나무통, 호각을 불어대는 통신수단이란 귀신들의 피바람 같았다. 제2대대(PPCLI)는 자기목숨보다 더 소중한 명예를 굳게 지켰다. 드디어 4일째 가평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강력한 백병전 속에 적들은 퇴각하고 말았다.

동포들의 고마운 감사표현
현충일 행사시엔 빨간모자의 해병전우들이 당당하게 사열을 한다. 노병이 된 청룡도 함께 있다. 해마다 빠지지 않고 가평전투를 고마워한다. 대한 해병대위를 뒤따라 많은 2세들이 늘어난다.
모국을 그리는 현충일처럼 캐나다는 제2고향이 되어간다.우리들 2세들이 PPCLI나 전투공병이 되어 아프카니스탄에 평화군으로 진주하고 있다. 물론 소수지만…
용맹스런 2세들은 제2의 고향이 된 이땅의 평화를 사랑한다. 캐나다가 모국땅에서 연결되는 우리땅인 까닭이리라.



편집자 주 : 오는 6월 25일 한국전(6.25) 발발 56주년을 맞게 되었다. 캐나다군은 1950년 7/30일 해군 참전을 시작으로 53년 휴전시까지 총 26,791명을 파병하여 UN 깃발아래 참전한 16개국중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수의 군대를 파병한 나라가 되었으며 휴전후 55년까지는 약 7000명이 추가 파병되었으며 총 516명의 캐나다군이 전사하였다.
아울러 1951년 4월 하순 서울을 향해 진격하던 중공군은 가평강 양쪽 가파른 고지를 방어하던 캐나다군과 호주군을 공격했으며, 24,25일 저녁 중공군 약 6천명이 캐나다군을 공격해왔다. 캐나다군은 박격포와 포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진지를 사수했으나, 10명의 전사자와 23명의 부상자를 냈다. 캐나다군은 한때 적군에 완전히 포위당해 비행기에서 낙하산으로 떨어뜨린 식량과 탄약으로 버티며 싸움을 계속했으며, 26일 미군이 위기직전의 캐나다군을 극적으로 구했고 이 치열한 전투를 통해 캐나다군은 중공군의 춘계대공세를 막아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6년 6/23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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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등록일: 200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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