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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수첩)고당 조만식 선생(1)
조만식 선생은 최후의 민족주의자다. 만주사변(1931년) 이후로 민족주의자들이 모두 변절하여 일제에 협력하고 아부하며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았지만 조만식 선생은 끝까지 일제에 항거했다. 해방 이후에도 소련과 김일성 공산정권에 반대하다 연금되었으나 끝까지 회유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주변에서 모두 월남을 권유했으나 “북한동포를 내버려 두고 혼자 월남할 수 없다”면서 거부, 6.25 전쟁 중 공산당에게 살해되었으니 삶의 마지막도 민족주의자로서 부끄러움이 없었다.
필자는 이번 서울 여행 중 많은 역사적 인물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중 한 분이 고당 선생이다.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우뚝 솟아 있는 동상, 동행한 지인과 함께 고당 선생 동상 앞에 서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권력을 잡기 위해 온갖 술수와 거짓이 난무하고정치성향 다른 사람이 당선되었다고 종북 좌파 운운하는 이런 정치상황을 선생은 하늘에서 어떤 마음으로 내려다 보고 있을까?
선생의 고향은 평안남도 강서군이다. 선생의 부친 조경학은 “사람은 의리가 있어야 하고 절의를 존중하고 지켜야 한다”며 자녀들에게 의리와 절의를 강조했는데 선생은 평생을 두고 부친이 강조한 말을 지켰다.
선생은 22세 늦은 나이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하며 기독교 신자로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숭실중 재학 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에 감화 받고 일본유학을 결심했다. 외세를 물리치고 민족을 구하는 길은 실력을 양성하는 길이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간디의 무저항주의에, 민족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도 이때로 선생은 항일운동 내내 무저항 비폭력 항일운동을 했다.
김구선생이나 이회영선생처럼 독립군을 조직해 일제에 무력 항쟁하는 무장 항일운동도 필요하지만 국산품 애용운동, 민족자본을 모아 회사 공장을 설립해 운영하는 물산장려운동, 학교설립 등 비무장 독립운동도 필요한 것이다. 이런 무저항 비폭력 항일운동으로 선생은 ‘조선의 간디’라고 불리었다.
동경유학시절 선생은 두 가지 일을 성사시켰다. 당시 동경유학생들은 장로교 따로, 감리교 따로 모여 예배를 보았는데 선생은 연합교회를 만들었다. 기존의 두 교회를 ‘재일본 동경 조선예수교 연합교회’ 하나로 통합해 유학생들이 같은 자리에 모여 예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외국에 나와서까지 교파문제로 교인들이 분열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선생의 판단은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반드시 본받아야 할 정신이다.
또 한가지 동경유학생 사회를 위한 일은 출신 지방별로 따로 따로 모이는 유학생 사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노력에 힘을 기울인 것이다. 그 일환으로 “고향 묻지 말기” 운동을 전개해 전라도 출신 송진우, 경기도 출신 안재홍과 힘을 합해 출신 지방별로 나뉘어 있던 유학생회를‘유학생 친목회’로 통일 시켰다. 해외에 나와서까지 반목과 분열을 일삼는 해외 한인들로서는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1913년 31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법학부를 졸업한 선생은 오산학교에 부임해 교사로 교장으로 8년을 봉직하며 학교를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 더구나 설립자 이승훈이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학교 운영조차 힘든 시기에 무보수로 일한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잊혀질 수 없는 3.1운동 때 선생도 오산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3.1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일제에 의해 수배령이 내리자 상해로 망명을 기도했다. 그러나 일본 헌병의 추격을 받아 체포되어 1년 형을 받고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외아들이 형무소에 수감되자 선생의 부친이 직접 면회를 왔다. 부친은 외아들에 대한 걱정 근심 염려를 일체 내색하지 않고 형무소에서 주는 콩과 수수로 지은 밥을 먹어보고는 “이 정도 밥이면 건강을 지키는 데는 이상이 없으니 걱정 말고 사내에게 이런 고생을 아무것도 아니니 참고 견디라”며 용기를 돋아 주었다.
1년 형을 받고 10개월 복역하자 가석방을 받았다. 그러나 선생은 “이미 10개월 수형생활 한 것 자체가 불법인데 이제 와서 가석방으로 출소시키는 것은 더더욱 불명예스러운 일이니 나는 가석방을 거부한다. 2개월 더 살다 출소하겠다.”고 버티었다.
출소 후에는 풀뿌리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YMCA를 중심으로 지역사회 공론을 형성하고 물산장려회를 조직해 그 지역 개신교계, 상공업계, 여성계, 교육계, 청년계를 묶어 인적자원을 구성하는 둥비폭력 항일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선생은 9개월간 조선일보 사장을 지냈다. 당시 조선일보는 망가지기 전으로 민족주의자들이 모인 민족주의 정론지로서 신사참배, 학병에 협조하라는 총독부의 요청을 전부 거부했다. 그러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온 선생은 경성(서울)에서 활동에 적응을 잘 하지 못했고 경영악화와 지역감정 때문에 9개월만에 사장직을 사임했다.
신간회 조직에도 선생은 깊이 관여해 발기인이 되었다. 신간회는 민족의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연합체로서 외국의 위임통치나 청원하는 이승만과는 질이 다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2차대전에서 일본 제국주의 패배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던 1943년 총독부와 조선군 사령부는“조선 청년들이 전쟁에 참전하는 것이 진정한 내선일체를 이루는 것”이란 것을 선생이 청년들에게 설득해 줄 것을 회유했으나 거부했다 구금되기도 했다. 핍박을 각오하고 일제의 협력을 거부하던 선생이 친일파라는 누명을 쓴 적이 있었다.
1943년 11월16일 매일신보(총독부 기관지)에 선생 명의로 ‘학도에게 고한다’라는 학병 지원기사가 실렸다. 학생들에게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이 글은 매일신보 평양지사장인 고영한에 의해 날조된 기사라고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규정하고 있다.
대한 언론인회보 2000년9월1일 기사에 당시 매일신보 평양특파원 김진섭이 쓴 글이 근거다. 김진섭은 고당을 인터뷰하라는 고영한의 지시를 받고 고당을 찾았으나 고당은 “할말이 없다”면서 인터뷰를 사양했다. 며칠 후 고영한이 직접 고당을 찾아 갔고 사흘 후 문제의 인터뷰가 실렸는데 조작 기사인 것이 명백했다.
해방 후 고영한은 자살했다. 평소 직원들이 친일파라고 몰아세웠고 고당 선생 인터뷰 조작기사로 자책하는 것을 주변에서 많이 보았다는 이야기가 무성했다. 고영한의 인터뷰 조작기사는 후에 북한에서 선생을 제거할 때 정치적으로 악용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기사 등록일: 2011-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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