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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수첩) 고당 조만식 선생(2)
고당선생은 장로다. 예장(예수교 장로교)장로인데 같은 예장 장로라고 해서 소망교회 이 장로나 충현교회 김 장로와는 격이 다른 장로다. 일제시대 대부분 교회가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무릎 꿇고 신사참배 할 때 신앙을 지키며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스승이 고당 선생이다. 주기철 목사는 오산학교에서 고당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고당선생이 장로로 있던 산정현교회가 후임목사를 선임할 때 임시당회장박형룡목사가 주기철 목사를 천거하며 오산학교 출신이라고 했다. 유계준 장로(6.25때 순교)가 말을 받았다. “그럼 조장로가 알겠구려?” “내가 잘 알디, 똑똑하고 신앙에 뼈대가 있디.” 평소 당회에서 말이 없던 고당의 이 두 마디는 천근의 무게처럼 당회를 울렸다. 잘 아는바 대로 주기철 목사는 산정현 교회 부임했다.
“보이는 천황에게 충성을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충성하냐?”면서 천주교, 감리교, 장로교가 앞을 다퉈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신사참배를 결정할 때 일제에 항거하며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외롭게 순교한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교회 뒤에는 고당선생이 있었다.
주기철 목사에 감옥에서 순교하고 교회가 폐쇄되자 고당선생은 가족을 데리고 고향 강서로 내려갔다. 해방을 코앞에 두고 평안도 도지사는 차를 보내 고당선생을 평양으로 모시려 했다. 전후 통치권 교섭을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고당은 “왜놈 총독이 보낸 차를 탈 수 없다”면서 거부했다.
해방이 되었다. 나라를 빼앗길 때 27세 청년이었던 고당은 세월의 나이테를 두른 62세 중년이 되었다. 만주군 장교를 지낸 백선엽이 잠시 고당의 비서를 지냈다. 극우 수구세력들은 백선엽이 고당의 비서 노릇 잠시 한 것이 친일행적을 지울만한 대단한 공적으로 여기고 있지만 그런 일로 그의 친일행적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6.25때 세운 전공은 인정해야 하지만 친일행적도 인정해야 한다.
고당은 해방정국에서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위원장이 되어 치안공백 상태의 정치적 혼란을 정리하며 해방된 조국의 뼈대를 만들어 나가는 일에 참여했다. 소련군 정치장교는 “평양은 조만식 판이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평양을 비롯한 평안남도에서 고당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고당은 건국치안대원을 위문하는 자리에서 “우리 민족에겐 총칼이 필요 없다. 총칼을 휘두르면 총칼로 망하거든.”이라며 비폭력 저항운동가다운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김일성이 진주하며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소련군 정치장교 소개로 김일성을 만났다. 고당은 군정을 반대했다. 남한에서는 미군이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실시하는 군정을 반대하며 “김구, 김일성, 이승만을 포함하는 중앙정부 구성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12월1일까지 중앙정부를 구성해 외국군대를 철수 시켜야 한다.”면서 김일성이 점령군 철수를 의도적으로 방해한다.”고 비판했다.
10월7일 고당은 북조선 5도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한달 후 11월3일에는 민족, 민주계열의 최초 기독교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했다. 11월3일에 창당을 한 것은 광주학생 운동(1929년11월3일)을 기념하는 의미에서였다. 창당 몇 개월 만에 당원이 50만명이 넘었다는 것에서 고당이 갖고 있는 인품과 권위를 알 수 있다. 이런 고당의 인품과 권위를 공산당은 이용했다.
고당은 김일성이 남북 분단상태에서 정당을 만드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민족이 통일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분단을 영구화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김일성대로 고당을 만날 때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따르는척 했으나 뒷전에서는 “조만식은 초기에 죽여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소련군은 조만식과 조선민주당이 친소 입장으로 돌아서게 회유와 협박을 가했으나 오히려 공산주의자 및 소련과 충돌하게 되었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갈등이 충돌의 직접원인이 되었다. 고당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한 ‘통일 임시정부 수립’에는 찬성했으나 소련을 후견인으로 한 신탁통치에는 강력히 반대하였다. 소련 극동군 사령부는 고당에게 새로 수립될 정부의 대통령을 보장 하겠다고 세 차례나 설득했으나 고당은 끝내 소련의 제의를 거부했다. 조만식의 제자인 최용건은 고당을 19번 찾아가 설득했으나 고당은 소련의 후견인 의정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최용건은 오산중학교 시절 고당의 제자로 김일성 선배 혁명가로 김일성에게 반말 할 수 있는 예외적 인물이다. 김책, 김일성과 더불어 항일 무장투쟁 트로이카인 그는 6.25를 반대한 인물로 북한 국가수반과 부주석을 지냈다.
민족주의 소신을 지키는데 투철한 고당이소련이라는 외세가 제공하는 대통령직을 거절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외세를 배격한 절대독립을 추구한 고당의 정신은 이승만과 비교해 볼만하다. 이승만은 권력욕에 사로잡혀 임시정부 시절부터 남의 눈총을 받으며 분열을 일삼더니 해방 후 친일파와 야합하고 미국이라는 외세를 앞장세워 대통령에 올랐으니 말이다.
소련의 제안을 거부하며 충돌한 고당은 46년 1월5일부터 고려호텔에 연금되었다. 2월4일에는 조선민주당에서 강제 축출되고 최용건이 당수가 되었다. 46월 1월5일부터 연금돼 50년 10월18일 공산군에게 피살 될 때까지 월남 권유를 많이 받았으나 고당은 “이북 동포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혼자 월남할 수 없다”면서 듣지 않았다. 연금 중에도 면회는 자유로워 남, 북의 지도급 인사들이 고당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6.25 발발 직전 남북은 이주하, 김삼룡과 고당을 교환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제안은 제안으로 끝났고 전쟁이 나고 인민군이 패퇴하던 10월 고당은 공산군에게 피살당했다. 피살 날자는 10월15일, 10월18일 두 가지 설이 있다. 10월15일 내무서원들에게 피살되었다는 설, 10월18일 내무성 정보처 한규만 소좌에 의해 피살 되었다는 설이다.
고하의 비극은 한국의 비극이다. 러시아연방 국방성 중앙문서보관소 소련 군정문서의 남조선 정세보고서(1946-1947) 내용에 의하면 김구, 김규식, 김두봉, 김일성, 박헌영, 여운형, 이승만, 조만식 중에서 남북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여운형과 조만식을 수립될 정부의 대통령으로 꼽았고 이승만, 김규식을 지지한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고 한다. 정세보고서대로라면 대통령 해야 할 사람이 안되고 엉뚱한 사람이 대통령 된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45년 10월7일 고당을 마지막으로 만났다고 회고했다. 고당은 함석헌의스승인 유영모와 동창이자 친구였다. 스승의 친구에 대해 함석헌 선생은 “남들이 조만식 조만식 할 때 솔직히 말해 왜 무엇 때문에 위대한지 몰랐다. 그런데 죽음을 앞 둔 선택에서 ‘그렇다’가 아니고 ‘아니다’라며 죽음을 택할 수 있는 것을 보고 역사의 인물로서 조만식의 가치를 알았다. 비겁한 민중을 위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죽음으로 보여준 민중의 참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오충근 기자)

기사 등록일: 201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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