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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생의 후반부를 보면 그 인간을 알 수 있다
채근담은 명나라 때 홍자성이 쓴 책이다. 이 책에는 성경의 잠언과 비슷한 내용의 인생의 교훈이나 삶의 지침이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을 배경으로 쓰여있다. 인생의 보편적 원칙은 성경의 배경이 되는 중동지방이나 채근담의 배경이되는 동북아시아나 마찬가지로 채근담에는 노년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좋은 예가 있어 소개한다.
한 인간에 대한 평가는 관 뚜껑을 덮을 때 알 수 있다고 했듯 채근담 92장에서도 聲妓, 晩景從良, 一世之臙花無碍. 貞婦, 白頭失守, 半生之情苦俱非. 語云, 看人只看後半截, 眞名言也. 라고 말했다.
무슨뜻인가 하면 “비록 기생이라도 늘그막에 한 남자를 쫓아 살면 한 세상의 연분으로 꺼릴 것이 없고 한 평생 수절하며 살더라도 백발이 되어 절개를 잃으면 한 평생 지켜온 절개가 보람이 없다. 속담에 이르기를 사람을 보려거든 생의 후반부를 보라고 한 말이 정말 명언이다.”
예를 들어본다면 3.1운동 때 기독교 대표로 33인에 들어가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나중에 변절해 일제에 부역한 목사들이 있다. 필자가 감리교 출신이라 그런지 얼핏 생각나는 사람이 박희도 목사다.
박희도 목사는 기미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한명일뿐 아니라 김창준, 이갑성, 이필주 등 감리교 인사들은 3.1운동에 참여하게 한 핵심인물이다. 3.1운동에 참여한 박목사는 징역 2년을 언도 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오고를 치렀다. 그 후 러시아 10월 혁명 기념일에 잡지 ‘신생활’ 기념호를 발간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옹호하는 기사를 실었다 다시 2년 동안 감옥에 가는 등 일제치하에서 고난을 겪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박희도 목사는 민족의 선각자요, 믿음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기독교 목사요,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독립지사였다. 박희도 목사가 일제에 동조하기 시작한 것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로 대부분의 지식인들, 보수주의자들이 그때부터 변절해 일제에 부역하기 시작했다.
만주까지 침략하는 욱일승천하는 일본의 기세에 낙심하고 절망했겠지만 박희도 목사는 초심을 버리고 일제에 부역하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는 1939년부터는 적극적인 친일로 돌아섰다.
우리는 친일파를 분류할 때 적극적 친일과 생계형 친일로 나눈다. 해방 후 자신의 친일행각을 감추느라고 4.3 제주 항쟁, 10.1 대구항쟁에 탄압에 주도적 역할을 한 조병옥도 Pro-Job 과 Pro-Jab으로 나누며 스스로를 생계형 친일인 Pro-Job으로 분류했지만 박희도 목사의 친일은 조병옥 식 친일 감별에 의하면 생계형 친일이 아닌 적극적 친일이었다.
박희도 목사는 자신이 사장으로 있는 잡지 동양지광 창간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 때에 반도 2천만 동포의 가슴 속에 일본 정신을 철저히 하고, 황도정신을 앙양하고, 폐하의
적자(赤子)로서, 황국 일본의 공민으로서 예외없이 국체의 존엄을 체득하고 황국 일본의 대사명을 준봉하고 황도의 선포국위의 선양에 정진하고, 그리하여 동양의 평화는 물론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일대 이상을 펴서 세계 인류의 문화 발달과 그 강영복지 증진에 공헌할 것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습니다. 생각컨대 이 대의를 이해하고 이 이념을 체득할 때 일본국민으로서의 영광과 긍지를 감득치 않을 자 누가 있겠습니까?”
박희도 목사는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이승만이 반민특위 해체하면서 풀러 났다 한국
전쟁 중에 병으로 죽었다. 그의 이름은 친일인명사전에 친일파로 등재되어 있으니 젊어서 민족의 앞날에 빛과 희망을 주는 독립운동 하다 두 번의 옥고를 치르며 일제에 항거한 수고와 노력이
허망한 일이 되고 말았다.
같은 감리교 목사지만 손정도 목사는 박희도 목사와 반대되는 길을 걸었다. 손정도 목사는 복음주의 목사로 동대문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 1년만에 교회가 터져나갈 정도로 교인이 증가했다. 1914년에 성년교인 924명 주일학교 학생 786명이었으니 교인수로 목사 능력 판단하는 요즘 교회에서 청빙하고 싶은 목사일 것이다.
1년 후 정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서는 남자석여자석을 갈라놓는 휘장을 없애고 남녀 구별 없이 앉아 예배 보는 등 획기적 방법 등으로 성년교인 1952명, 주일학교 학생 820명의 대교회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손정도 목사는 잘 나가던 목회를 그만두고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해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내기도 했고무장 독립운동단체 의용단 조직에도 관여했다. 조국 광복이라는 대의를 위해 스스로 형극의 길을 걸은 손정도 목사는 상해에서 만주로 건너가 선교활동을 겸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손정도 목사는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실에서 남, 북 양쪽에서 존경 받는 인물이다. 손정도 목사의 장남 손원일 제독은 해군의 아버지로 초대 해군총장 및 국방부장관을 지냈고 차남 손원태 박사는 평양 애국열사능에 묻혀있다.
김일성은 “평생을 항일성전에 바친 지조가 굳고 양심적인 독립운동가이자 애국지사”라고 손정도 목사를 평했다. 손정도 목사와 박희도 목사는 같은 감리교 목사로 같은 시대를 살았으나 한 명은 남북에서 존경 받는 인물이 되었고 한 명은 일제에 부역한 친일파로 낙인 찍혔다.
그러나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변절한 사람이 어찌 박희도 목사 한 명뿐이겠는가? 초심을 지키지 못하고 중도에 마음이 변해 빈축을
사는 사람을 주변에서 많이 본다. 구약성경 욥기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라고 했는데 욥기를 거꾸로
사는 사람들로 시작은 창대 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미약한 사람들이다.

한 동안 한인회가 조용했었는데 본지 독자투고에 한인회 관련 의혹제기가 또 시작되었다.  그 동안 제기된 의혹에 대해 속 시원한
답변이 없었다. 의혹은 그냥 의혹인지, 그 의혹 제기가 정당성이 있고 타당한 것인지, 특정인을 흠집내기 위한 부당한 모함이나
무고를 가장한 의혹인지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이 없다.

한인사회의 단결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조직된 한인회는 목적과 의도는 좋고 그 동안 많은 분들이 수고하고 노력하고 헌신했다.
이분들의 헌신, 노력, 수고가 박희도 목사처럼 중간에 변질되어 사리사욕이나 감투욕을 변해 인생의 후반부가 망가질 것인지,
손정도 목사처럼 지조 있고 양심적으로 한인회를 위해 봉사 헌신했는데 무고나 모함을 당하는 것인지. 그 해결은 시간에만 맡겨야
하는가?

기사 등록일: 2011-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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