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한국에 있든지 캐나다 캘거리에 있든지 오늘날의 소위 "한국형(韓國形) 교회"를 말할 때 누구는 정통(正統)이고, 누구는 이단(異端)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심히 혼란스럽습니다. 저의 얕은 생각일 수는 있겠지만 아무리 스스로 정통 교리와 정통 신학을 앞세우는 교회라 할지라도 오늘날 교회들의 이런저런 우려되는 신앙 행태를 보면 진정 그들을 진정 “정통(正統)”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단”의 반대(?) 쪽의 의미를 “정통(正統)”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정통"이 교리와 신학에 정통하다는 말 뿐이어서야 되겠습니까? “정통”, 그 말이 진정한 “정통”으로서의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누가(어느 교파와 교단이, 어느 교회가) 인간들이 소위 정통적(正統的)이라고 합의한 교리(敎理)를 받아들이느냐, 신학을 정립했느냐의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정통"이라험은 누가 그 정통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예수의 삶에 변함없이 기반을 두고 있느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진정한 “정통”의 기준은 교권을 수호하고자 하는 종교적 인간들이 합의한 교리나 신학에 있다기 보다는, 누구의 삶(행함)이 가장 예수적이냐, 예수다운 삶이냐가 되어야 옳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교 ‘이단 판단의 기준’이 성경(聖經)임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더부살이(종살이) 하던 떠돌이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하늘을 버리시고 그들의 고난 현장에 함께하시며, 억압으로부터 그들의 해방을 약속하신 하나님’(출애굽기 3:7-8)이시고, ‘사회적 약자인 과부와 고아 그리고 나그네-외국인노동자-를 보호해주시며(신명기 10:29) 그들을 위해 신원(伸寃)해 주시는 하나님’(신명기 10:18)이시며, ‘작은 자를 자신과 동일시 하셨던 예수’(마태복음 10:42, 18:10, 18:14 등)로 말합니다. 바로 그 하나님과 예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거나 추체험한 작은 이들은 그런 하나님을 “여호와”로, 그런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습니다.
바른 교리와 신학은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바로 이 하나님과 예수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리와 신학의 안내를 받아 하나님과 예수의 뜻을 오늘에 살아가느냐, 하나님과 예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다른 뜻(교파, 교단, 교회, 특정 일인)을 앞세우느냐 하는 것이 소위 “정통”과 “이단(異端)”의 분기점이라고 저는 봅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날 소위 '목회 성공'을 교회 대형화로 가늠하여 말하는 교회와 신앙의 풍토,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께서 그렇게도 귀하게 여겼던 작은 이웃들에 대한 사랑의 나눔을 백안시(白眼視)하거나 외면한 채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팽배해 있는 소위 "한국형 교회"와 그 신앙으로 어찌 자신들의 정통성 여부를 주장하고, 타 집단의 이단성을 운운할 수 있는지 ----- ?!
그러기에 다시금 생각합니다. 오늘날 누가 “정통”이고, 누가 “이단”일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단논쟁”이 교권을 주장하고, 교권을 수호하기 위해 타인을 정죄하는 다툼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되리라 생각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이단 논쟁(?)"은 더욱 예수다운 교회, 더욱 예수다운 신앙인으로 곧추서도록 추동하는, 예수 안에서 반듯한 교회와 성도로 다시금 바로 서도록 독려하는 예수의 채찍질로써의 논쟁 아닌 논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 좁고 한계가 분명한 게시판에서의 “이단 논쟁(?)”은 무의미 하다고 봅니다. 교회사 속에 수백 년 이어 온 “이단 논쟁(?)”이 여기서는 눈꼽만큼이라도 정리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뿐만아니라 “이단”이라고 지목한 이들이나 “이단”으로 지목받은 이들이나 그 누구라도 달라질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고, 오히려 좁디좁은 한인 사회 안에서 반목질시(反目嫉視)의 아픔만 되풀이 되고 커질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이든 타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지 누구를 무론하고 “이단”이라고 누군가를 지목해야 할 때가 오면, 또 어느 때인가 누구에게 “이단”으로 지목되어서 기가 막힐 때에는, 그리고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이단”이라는 미명 하에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날 때에는 누가 '옳으니' '그르니', 누가 '잘했느니' '잘못했느니'를 놓고 설왕설래 할 것이 아니라, 그 때가 되면 모든 교회들과 목회자, 그리고 크리스천들은 “지금, 여기에서” “내가 과연 예수의 자녀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 내가 예수의 종다운 목회를 감당하고 있는지?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우리의 교회가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로 반듯하게 서 있는지”, “우리 지역에서 교회가 교회다운가”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고, 그 외의 모든 사회 구성원들은 “나는 하늘을 우러러, 이웃 앞에서 반듯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되돌아보는 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변질되거나 흩어져 식어진 한인공동체의 사랑과 믿음을 다시금 회복하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의 때로 삼으면 어떨지---- 이런 생각을 하는 때가 되면 어떨까요?!

[공동번역성경] 신명기 14장 29절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있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너희하나님 야훼께서 복을 내리실 것이다. 레위인은 너희가 받은 유산을 함께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개역성경] 신명기 14장 29절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축복을 주시리라\"
저가 옛날을 생각해 어제도 이재0 목사의 이단성을 읽었습니다. 한구절 한구절 댓글로 링크할려다 그만두었습니다. 끊임없는 논쟁일 뿐입니다. 저가 올린다해도 그들은 만0교회를 다닐것이며 반문을 한다해도 저는 다르게 보지 않기 때문이죠. 저는 다시한번 그목사님께 묻습니다. 그렇게 병치유를 잘하시면 조용히 소록도에서 문둥병환자 좀 돌봐주시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