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뵙겠습니다, 라일락씨.”
침실 창문 옆에 라일락 나무가 있다. 현재 꽃망울이 막 터질락 말락 한다. 조만간 꽃이 피고 상큼한 라일락 향기가 퍼질 것이다. 나는 이 집에 8년 동안 살고 있지만 이런 상태의 라일락을 처음 본다. 그래서 저절로 인사말이 나왔다.
나는 장거리 트럭 운전사였다. 북미 대륙을 누비며 길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오랫동안 했다. 그동안 집에서 잔 시간보다 길거리에서 잔 시간이 더 길다. 그래서 내 집 침실 옆 라일락 나무에 꽃망울이 생기고, 활짝 핀 후, 기분 좋은 향기를 내뿜는 순간을 8년 만에 처음 목격하는 것이다. 기대가 크다.
한번 트립을 나가면 짧게는 일주일, 길면 3주 동안 길 위에서 보낸다. 아내는 그동안 먹을 각종 음식을 바리바리 준비했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불고기, 닭볶음, 돼지수육, 깐풍기, 카레, 짜장, 육개장, 소고기무국, 알탕, 순두부찌개, 부대찌개 등등 다채롭게 싸줬다. 트럭 안 냉장고 냉동실에 쟁여놓은 음식들이 점차 줄어들면 집에 갈 날이 다가온다는 의미였다.
간혹 트립이 끝나기 전에 음식이 모두 떨어질 때도 있다. 그땐 비상용으로 준비한 햇반과 컵라면이 끼니를 대신한다. 가끔 별식으로 트럭스탑에서 햄버거, 피자, 혹은 닭튀김을 사 먹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음식들은 부담스럽다. 젊을 때는 안 그랬는데 이제 소화시키기가 힘들다. 아내의 음식이 떨어질 동안 집에 못가 어쩔 수 없이 이런 인스턴트 먹거리에 의존할 때면 괜히 서글퍼지곤 했다.
아내는 계속해서 내가 일을 그만두길 원했다. 남들처럼 출퇴근하는 일을 구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그런데 최근 아내와 얘기를 주고 받다 보니, 아내는 나에게 바리바리 싸주는 음식이 하기 싫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 혹은 음식을 하기 싫다는 핑계로 내가 트럭일을 그만두길 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집에서 놀며 재정 상황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우린 생각보다 부자였다. 연금이 나오기 전까지 꽤 오랜 시간 일하지 않고 놀고 먹을수 있는 저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우리 둘 다 조기 은퇴가 가능하다. 고민이 시작됐다.
“까짓 것, 사람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도 자본가 돼지들의 세뇌 공작이다. 놀자!”
라는게 한 생각이고,
“사람이 어떻게 밥만 먹고 사니? 또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줄 아니? 일할 수 있을 때 바짝 벌어서 대비를 해야지!”
라는게 또 다른 내면의 목소리다.
아씨, 모르겠다. 일단은 좀 쉬자. 같은 집에서 살며 8년 동안 인사를 못한 라일락씨와 먼저 안면을 터야겠다. 고민은 그 후에도 계속할 수 있으니 말이다.